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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맨 앞자리 티켓을 샀다니.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앞자리를 샀겠지만 무대가 너무 높아서 오케는 앞 두어줄밖엔 안보인다. 하지만 연주자들의 생생한 연주소리를 들을수 있는것은 엄청난 잇점이긴 한데 목이 약간 아프고 북소리는 아무래도 소리가 크다보니 귀에 조금은 쌔게 온다. 아무튼 맨 앞자리는 어쩔수 없는경우 아니면 구매하지 마시길.. 목아픔 (연극같으면 앞자리라도 크게 문제될거 같지 않음)
국악기로 관현악단이 있을수 있을까? 관악기를 보면 태평소, 피리, 단소, 생소중대금류, 그 외 길쭉한 나발, 소라같은것도 있고 현악기는 해금(깽깽이), 가야금, 아쟁, 거문고 타악기는 북, 꽹가리(이건 관현악기로 넣기엔 좀 무리가 있으려나), 징, 장구 같은거
분명히 한국 전통 악기의 종류도 서양 악기 만큼이나 다양하고 각각의 독특한 음색들이 있다.
그래서 산조(일반적인 독주로 봐야 하는지 궁중음악을 빼면 모두 산조로 보면 될려나)는 좋은데 합쳐지면 뭐랄까... 서양악기들의 조화와는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국악기들의 음색은 거칠어서일수도 있는데 악기에 노이즈가 너무 섞여있다고 하면 맞을런지 바람소리가 많다고 해야 할지 현악기들도 현들의 투박하고 거친 소리는 해금마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양악기들은 이런부분에서 체계가 잡혀서인지 음색이 엄청 정갈하고 맑은편이다.
이번 국악악단에도 북은 팀파니가 있는데(더블베이스도 있는거 같음) 그 소리는 역시나 엄청 튄다. 개인적으로 팀파니의 소리는 북소리중엔 단연 으뜸이라 생각하는 입장에서 국악기의 거친 소리들과는 합쳐지기 쉽지 않게 느껴졌다.
소리가 명학하게 나뉘는 서양악기라고 해서 좋다는 의미는 아니고 단지 음색이 그러하니 연주형태나 청감에서도 느낌 차이가 크다는 것인데 거칠고 투박한 음색은 역시나 내면으로 침투하기엔 좋으나 이건 솔로일때 그런것이고 합쳐지면 비수같은 날카로움을 살려내기란 쉽지 않아보인다.
한국 고유 악기로 악단을 꾸려가는 단장의 최대 고민거리겠지만 오늘은 과거의 그 모래먼지같은 느낌은 확실이 줄어든 신기한 경험이었다.
아직까지 악단은 어떤 배경 효과음같은 조성이 많기는 한데 이런부분도 훨씬 극적이고 가야금, 피리 산조에서 서로 주고 받거나 받쳐주고 띄워주는 역할이 대단히 좋아서 웅장하면서도 감동적인 서양오케에서 맞보는 짜릿함을 국악단에서도 제법 감동적으로 느낄수 있었다.
가야금산조 협주에서 가야금이 그다지 극적인 악기는 아닌지라(악기때문인지 연주법때문인지는 모름) 감정을 끌어올려놓은 악단의 기조를 고스란히 받아내기엔 쉽지 않았지만 분위기를 바꿔놓는데는 충분한 협주자로서의 역할이 훌륭했다. 가야금이란게 쫘~악 뻗는 음색이 아니라서 웅장함의 바텀을 받아내기란 쉽지 않았을텐데 수십년간 닦아온 연주실력으로 만족스럽게 이끌어가는 모습은 산조를 들으며 울컥하게 만드는 드믄 경험이었다.
피리연주의 여유로운 솜씨(평생을 공부한 전문가들의 여유랄까?)는 표정에서 부터 즐기는것이 느껴질정도다. 무대를 즐기며 연주하는 모습은 전쟁터 가장 앞에서 말을 타고 전진하는 장수같은 풍모와 기개였다.
국악기 특유의 거칠고 투박한 놈을 노력으로 다져진 실력으로 모든것을 커버치는 진정한 명인들. 아마도 오늘의 모든 연주자들과 지휘자가 그러하지 않았나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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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녁 7시30분 공연인데 중간 쉬는 시간 포함해서 170분? 가끔은 이렇게 한밤중 공연 한편 기분좋게 보고 집에 오는것도 좋긴 한데 집까지 또 한시간을 가야하니 쉽지 않다. 올해는 앞으로도 적지 않은 편수를 평일공연으로 예매해놨으니 조금은 한숨이 나온다.
흔한 심청을 생각하고 왔다가 큰코다칠수도 있을수 있지만 전체적으론 그렇지 않다. 일단 한 90%는 심청전 줄거리를 거의 그대로 따른다. 1인 판소리 장르를 떼창으로 하니 다들 끝까지 좋은 목 상태를 유지해서 안쓰러움도 없고(한명이 하는 판소리 완창은 언제나 힘들어 보임)
현대적인 의상, 현대적인 배경으로 바껴있다. 현대물로 완전히 바꿔놓은것인가? 고전 '로미오와 줄리엣'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현대 버전같이?
인당수에 빠지는 부분까지만 봤을때는 옷만 현대적이지 그냥 고전물인가 싶었는데 끝은 그것과 거리가 멀어보이고 이해하기도 쉽지는 않았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들이 눈을 뜬다?까지는 내용 흐름상 장르가 판타지니 그러려니 하는데 이번 각색된것은 저 소녀의 정체는 무엇인가? 심봉사는? 환경은 조폭에게 당하는 일가족을 말하는거 같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무엇을 상징하는지 이해안되는 부분이 많다. 파격적이네 뭐네 하긴 하는데 기존 극에서 잔인성을 부각하게되면 웬만해선 파격적이 된다. 이 창극 역시 노랫가락으로 부드럽게 넘기는 부분을 좀더 현실감 있게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져들때 다리를 묶고 무거운 물체에 매달았다거나 하는건 아무리 심청이의 심정이 굳건하더라도 죽음앞에선 쉽지않기때문에 잔인한 현실의 실감나는 설정이다.
전제적으로 다른 공연에서는 접하기 쉽지 않은 기괴하면서 아방가르드(전위적)한 창연극인데 이런류의 특징이 너무 작가주의적이라서 이해해야 하는 관객입장을 잘 고려되지 않는다는것이 심각한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그래서 한국사람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알고 있는 심청전을 보면서 ???????? 라는 물음표가 나오게 하는것이겠지
좀 그렇고 그런 내용을 무대장치와 음악 그리고 창으로 떼우고 있는거 같다.
처음보는 광경으로 카메라맨 한명이 라이브로 계속 무대를 왔다갔다하면서 찍는다 그것을 무대 윗쪽에 실시간으로 적절하게 화면으로 뿌려지는데 개인적으로 저장영상을 무대에 플레이하는걸 싫어하지만 이번은 획기적이라 해야 할지 단순히 막 찍는걸 그냥 보여주는게 아니라 잘 짜여진 동선 그대로 연출이 원하는 그림을 그대로 만들어가는듯, 관객은 영상이나 무대의 배우들이 하나된 공연을 보는듯 거슬림 없는 훌륭한 무대를 만드는걸 보면서 감탄을 안할 수 없었다. 특히 흑백으로 표현되는 영상은 그 특유의 자극적으로 부각되는 표현은 일반 무대의 배우들에게 볼 수 없는 모습으로 인물의 이중적 모습을 실시간으로 감상할할수 있다. 다만 카메라맨이 기계를 주렁주렁 매달고 왔다 갔다 하니 시선을 빼앗기는거 같아서 좀 그렇지만 아무튼 오랜만에 느끼는 신선하고 창의적 연출을 본거 같은 뿌뜻함? 기분좋음? 대충 그런느낌이긴 한데
심청전 배경엔 분명 인신공양이 있었던 무지한 세계였을것이다. 왕과 함께 죽는 순장도 조선이전에 있었을정도였으니 인류 역사 한 1~2백년만 앞서가면 얼마나 미개한 생태계였는지 단번에 알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 인신공양은 대부분 여자아이, 갓난아기등을 했다는 것이다. (여아를 주로 했던것은 아무래도 전쟁으로 남자수가 부족하고 성인여자는 출산과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니 그런것이 아닌가생각됨)
아무리 그렇다고 지금 시대의 여자 아이들이 떼로 웃으면서 나오고(거의 백명은 되보임) 나중에 심청이가 죽고 다시 살아났을때도 떼로 서있는 장면은 뭔가 섬뜩하다. 특히 초입부분에 아이들이 막 웃을땐 공포심마져 들던데 일부 중년 여성들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귀엽다고 좋아하지만 나는 왜 공포심으로 다가왔을까? 인위적 웃음소리를 떼로 들어서 그런것인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웃어서 그런가? 물론 나는 저 웃음을 공감못한다. 심청이의 추정나이는 15세정도로 중학생정도인데 저 아이들은 누가봐도 초등생들이니 심청이 나이 15세면 그 시기 기준으로 결혼할 수 있는 나이로 예전 환경으론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시기라서 아이로 보기엔 무리가 있는데 저 기괴한 아이들의 설정은 무엇일까? 작가가 당시의 나이와 지금의 나이를 착각하는것인가? 꼬맹이 철부지 아이의 심청이를 생각하는것인가?
그리고 현대의상까지는 그러려니 하는데 심청이의 어머니(곽씨)가 돌아가셨을때 마피아, 조폭같은 의상은 뭐지? 심학규가 엄청 잘 사는 조폭인가?싶었다. 그런데 조폭같은 사람들은 심학규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냥 상가집에 온 사람들인데 한국사회에서 상가집에 방문한 사람들의 태도가 저렇다고? 어디서 조폭영화만 잔뜩 보고 온것일까? 이 연극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심청전이 무슨 전쟁, 스릴러, 폭력물인줄 착각하지 않을까?
그리고 심학규가 심청이 젖동냥할때 정말 무서웠다. 검은색 상복을 입은 여자들이 저고리 한쪽을 모두 풀어해치고 무표정하게 서있다. 그것도 수십명이.. 마치 자신은 젖동냥하는 마네킹인냥.. 그래서 더욱더 심봉사가 조폭 두목이고 저 여자들은 어떠한 환경으로 억지 젖동냥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인식했다. 물론 그것과는 관계없는 나만의 오산같다. 이런 전위적이며 추상적인 장르의 특징인 작가가 꼴리는대로 설명하니 좀 거북스럽고 이해가 안되는것은 필수인가. 이런것을 파격이라 하면.. 심청이가 심봉사를 이용해 돈벌고 장기 팔고 흥청망청 사는 내용으로 바꿔놔도 파격이라 포장하겠지.
현대적 해석은 일단 고전의 내용을 충실히 하면서 현대인들의 시각을 가미해서 재해석해야 하는데 이렇게 비꼬아놓고 해석을 달리했다는건 납득하기 쉽지 않다. 이 작가 작품중 '점찌고 옹녀'를 봐도 여성주의적(페미니즘) 시각으로 좀 이상하게 꼬아놔서 비주얼은 좋아도 막상 내용은 별로였는데 이 작가의 특징인지..(작가마다 뷰에 몰빵하고 내용은 겉치레에 불과한 사람도 있고 반대인 사람도 있고)
아무튼 이상한 오해를 받을수 있는 충분함이 있다.
그리고 장승상댁 부인은 무슨 매춘부 알선하는 사람처럼 묘사하는건 왜일까. 조폭 느아르를 만들고 싶었던거인지도 모르겠다. 선인을 악인으로 바꿔놓는것이 현시대의 시선이란소린지 아마도 이부분은 심청이가 막판에 만신창이가 되니 그 일환으로 장승상댁도 그런 주변인물로 바꿔놓은것일수 있긴 하지만 이럴바엔 '심청'이란 제목을 쓰지 말던가. 이게 이렇게 되면 심청전 원전대로 만들어지는 공연을 볼때 색안경이 씌어지지 않겠나. 선악이 갈리는 장르는 아니지만 묘사된 인물의 성품에 색이 있다면 그 성향은 바꿔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전 조폭을 미화하는 영화가 문제 됬던것은 수많은 사람 중 소수가 미화된 혹은 악화된 것을 그대로 받아드려 사회 문제가 될수 있기때문 아니었나)
그리고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보이도록 만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공양미 300석을 시주하면 눈을 뜰수 있다고 얘기했던 화주승을 거의 악의 화신처럼 그려놓고 있다. 공양미 이야기 자체가 가스라이팅해서 자신의 딸을 사창가(장기 매매인가?) 같은곳에 팔라고 강요하는듯한 나쁜놈의 우두머리처럼 그리고 표현한다. 이름이 요나김(김요나라고 한국 이름표기법대로 사용하는것도 아니고 외국 방식대로 했다는것은 자신은 한국인이 아니라는것을 표현한것일텐데 한국사람 껍떼기를 한 외국인인가? 글로벌시대에 이런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국사람인척 하면서 뒷구멍으로 한국 욕하고 자신의 이익추구만을 일삼는 매국노들이 문제지)이던데 종교적 색채가 묻어나오는건 나의 선입견때문일거 같다. (찾아보면 요나는 남자 세레명이라 하던데 이분은 여성 아닌가?)
전체 배경이 조선시대 어떤 효를 강요하듯 꾸며낸듯한 이런 내용이 아닌 거친 배경에서 생존을 위해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세상에 악마화 된 종교인이 없을리는 없겠지만 심청전에서 화주승이 갖는 의미는 종교에 대한 어떤 망상같은 성찰과 거짓 능력 등이 부각되는 주된 장면으로서 서유기에서 멍청해보이는 삼장법사가 지니고 있는 종교적 상징성과 비슷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인물인데 시정잡배, 사기꾼따위로 만들어 놨다는것은 기독교의 에반겔리즘(복음주의)으로 비롯된 배타주의의 파생이 아닐까? '너네가 믿는 저 종교의 뒷모습은 이렇게 추악한 사탄과 같은 존재다~'라는것을 우회하여 비꼬듯
화주승때문에 심청이는 인당수에서 죽게 되는데 문제는 이로인해 다시 살아나고 황후(조선시대에 황후가 있나?)가 된다는 온갖 설화를 막 가져온듯한 이상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전체 뼈대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고? 그것도 사상적 뼈대가 되는 불교와 도교의 자비롭고 신비로웠던 세계를 개깡패같은 놈으로?
작금의 한국은 이상한 미신에 휘둘려 나라가 개판일보직전까지 몰렸다가 한국 민중들께서 합심해서 간신히 위기를 되돌려놓은 상황이니 종교의 폐해를 모르는바 아니지만 그렇다면 고전을 현대물로 재해석하는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신작을 만들어야지 멀쩡히 있는 과거로부터 사랑받아왔던 한국인 정서에 잘 부합하는(아비가 딸을 파는것 말고) 내용을 가지고 와서 썩어버린 사회에서 치유되지 못하게 만들어놓는것은 어떤 저의가 있는지 솔직히 의심스럽다.
이 공연을 본 사람은 앞으로 심청전을 효녀심청이로 볼 수 있을까? 영화 '아마데우스' 때문에 살리에르를 천하에 못된놈으로 바꿔버렸는데(아무리 영화적 허용이라해도 이러면 안되는거 아닌가?)
효자,효녀란게 과거에 허벅지 살을 도려내어 부모님을 공양했다는 것이 지금 통용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판소리 심청가는 전체적으로 보면 좀 해학스럽다. 심청이 어머니는 가부장적인 남편을 극진히 모시고 심청을 낳았지만 딸이라서 좀 서운해 하기도 하고 (심학규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심학규가 봉사기때문에 부귀영화도 힘든 상황)
심청이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대목은 무척 슬프다만 이 후부터는 심학규와 심청이의 부녀지간 사이도 적당한 그냥 형편 어려운 가정이었다. 딸자식을 어떤 꾀임에 빠져 300석에 팔았다손 치더라도 황당한건 생각보다 심학규의 삶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는것 뺑덕어멈과 동거를 할때도 딸 팔아 공양 후 남은 돈으로 적당히 잘 먹고 잘 살다가 돈이 거의 떨어질 무렵에 심청이는 인당수에 빠져 죽다가 살아나 용궁에서 엄마도 보고 착하게 살았다고 황후가 되서 맹인잔치를 열고 각 고을에선 돈을 줘가며 잔치에 보내니 심학규 입장에는 땡큐 아닌가?
제일 특이한건 심학규는 맹인잔치에 가면서 뺑덕어멈을 잃었지만 홀로가면서 여인네들 일좀 도와주며 밥,고기 등 얻어먹고 옷을 홀라당 잃어버렸음에도 기지를 발휘해 옷, 노잣돈, 담배(당시엔 비쌌다고 함)도 얻는등 웃기게도 좀 황당한 호사를 누린다. 게다가 안씨를 만나서 결과적으론 재혼까지 하게 되는데 안씨는 부자기도 하다. 아마도 심청전에서 승자는 심학규가 아닐까싶을정도
심청전의 특징은 웬만해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행복하게 끝난다는 것. 심청가, 춘향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 이런 한국 공연문화를 보면 한놈만 완벽하게 나쁜놈을 만드는 경향을 보긴 쉽지 않다. 그래서 결국 다같이 조화롭게 잘 살아간다는 황당한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특정 종교적 시선이 가미되면 선악이 확실하게 구분되면서 중간에 선을 딱! 그어놓으려 애쓴다. 이번 '심청' 창극을 꼭 그렇게 볼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3시간 남짓되는 동안 해학은 어디에도 없고 우울하고 암울하며 더럽고 추악하다. 영화 '베트맨'의 고담시티나 영화 '씬시티'같이 디스토피아도 아니고 유토피아도 아닌 못된짓을 하면 적당히 밥은 먹고 살거 같은 세상이랄까?
왜곡된 섹스어필, 이런 배경이라면 당연히 필요하겠지. 괴기스러운 여자들, 북에 피는 왜 발라놓은것일까? 이럴때 피는 여자의 그것을 상징하긴 하는데 그것이 맞을까?
오늘 콘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였지만 퇴근 후 3시간동안 졸음따위는 개나 줘버린 몰입력 끝장나는 창극이었으나 무엇인가 가슴한편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남아있다는것은 전위예술의 특징이려나.. 신선함은 최고인데 무엇이 불편하게 만드는걸까.. 재미있는지 없는지 가늠하기엔 어려우니 두어번은 더 봐봐야 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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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더운 날이라서 국립극장까지 버스 갈아타며 갈만큼 괜찮은 연극이길 기대했었다. 웬만하면 연극볼때 큰 기대를 하지 않지만 그래도 가는길이 고단하니 코딱지 만큼 기대했다. 무대에 많이 서있는 나무들. 한겨울이 배경이라서 그랬을까. 극장 내부도 약간은 선선(추울정도는 아님)
연극이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배우 한둘이 무대를 가로질러 횡단한다. 지나가는 행인1,2 같은.. 마을 분위기와는 다르게 평온한 걸음들..(마을의 사건들을 생각하면 다급하거나 조급해야 할거 같았는데)
그리고 시작하자마자 한 남자를 기절시킨후 거꾸로 매달아 목을 딴다. 매우 잔인할수 있지만 무대가 너무 어둡워서 앞에서 5번째 줄임에도 배우들이 엄청 멀게 느껴져서 잔인하지도 않고 피가 피같아보이지도 않았지만 상황은 무서웠다. 연극에서 사람을 거꾸로 매달고 칼로 목을 그어 피를 받다니. 동물 잡아서 피 뽑아먹듯
어두컴컴한 곳에서 사람을 도륙하는 장면을 연극에서 본다는것은 약간은 충격이었지만 배우들의 세밀한 부분들이 전혀 보이질 않아서 감흥이 별로였다.
난해한 배우들의 움직임들. 이게 뭐하는 짓들일까? 무엇을 상징하는거 같지만 전체 내용은 별볼일 없기때문에 이러한 행위들은 없는것을 있어보이게 하려고 하는 수작질(단순한 플롯을 좀더 복잡하고 난해하게 보이려는 개수작)로 밖엔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학원폭력. 서양에도 학원폭력이 심한것일까? 남자주인공 오스카의 배경으론 집단괴롭힘을 당하는 고등학생? 학교선생은 여학생들 옷 갈아입는것을 훔쳐보느라 오스카가 폭행당하던 말던 신경 안쓴다는 대화가 나오는걸 봐서는 이 나라의 교육현실이 개판이거나 과장되었겠지만 대부분 이런건 현실을 반영할거란 생각이다. 그래서 위키에서 원작을 찾아보니 1980년대 무렵 스톡홀름 노동자들의 현실을 충분히 반영한 것으로 불안, 고립, 학원폭력, 소아성애, 살인..등 수많은 사회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와 같은 배경지식이 없다면 일단 이 연극을 이해하는것은 물건너간것이다. 한국인이 이해되도록 각색을 해야하는데 연출이 외국인이라 그런가? 지가 알고 있는 배경을 한국인도 알고 있겠지 싶었나보다. 원작 그대로 영화에서 가능한 표현을 제대로 표현도 안되면서 연극에서 마구잡이로 써대고 있다. (보다보면 연극치고는 멋지지만 영화를 생각하면 허접하기 그지 없다. 이런 오컬트같은 호러 멜로를 연극에서 표현한다는게 맞는 것인지 난 늘 궁금하다. 그리고 제대로 표현된것을 본 기억이 없다.)
난대없는 흡혈귀라니.. 이와 비슷한 내용을 만환지 영환지 어디선가 본거 같긴 한데 아무튼 흡혈귀여자 엘리를 위해 피를 구해주며 사랑하는 상대자 이 극을 모티브로 만든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작품은 당시의 노동자들과 학생들 그리고 사회를 표현하고 있는거 같다. 하지만 한국에서 전혀 먹히지 않는 방법으로 풀어내려고 한다.
그지같은 흡혈귀. 현실을 도피하는 용도로 서양에서는 흡혈귀를 종종 이용한다. 불노불사, 귀족, 부자.. 등 서민들이 꿈꾸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기때문이고 흡혈귀가 피를 나눠주면 그 사람도 흡혈귀가 되어 불노불사 되니 서양인들에겐 매력있는 도피수단으로 보이는거 같다. 반면 한국에서 이와같이 귀신같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것이 있을까? 기껏 있어봐야 도사? 도사는 오래살긴 하지만 총맞아도 죽고 칼맞아도 죽는 그냥 가만히 있을때만 영생하는 존재정도로 일도 해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한다. 생각보다 큰 능력을 지니고 있어보이지도 않는 인간적인 존재인 반면 드라큐라(흡혈귀)는 좀 다른 존재로 모든 능력이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다. 심지어 괴롭지만 아무것도 안먹고도 영생한다.(못 먹어 피골이 상접하여 고통스러워하긴 해도 죽진 않음)
이런 존재를 이용하여 고통받는 한 생명을 구원하는 구성은 흔하디 흔하기때문에 이럴경우에는 그 배경을 보거나 관객을 이해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 연극은 전혀 이해시키지 못한다. 물론 한국에서도 집단괴롭힘이 사회문제였기때문에(지금도 문제는 계속될것으로 보임) 오스카가 겪는 수많은 고통을 모를수는 없지만 배경에서 무언가 한국사회하곤 맞지 않는다.
이것은 연출이 한국사회를 전혀고려하지 않은 처사로 책 번역을 사전적 의미로만 번역을 해버린것과같이 어색하게 다가오고 저들이 겪고 있는 아픔은 어떤 벽에 가로막혀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정작 읽혀야 할 그 무엇은 오간데 없고 재미없는 흡혈귀 맬로 한편 본것으로 밖엔 안느껴진다.
특히 막바지 흡혈귀(일라이)가 인간(괴롭히는 나쁜 사람들)을 학살하는 장면은 뭐랄까? 여자는 허공에서 허부적거리고 있는데 멀쩡한 남자들 셋이 그냥 '아~'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빙신같은 장면은 지금도 황당하기 그지 없다. 연출은 왜 이런 어이없는 장면을 생각한것일까? 드라마나 영화로 평이 좋았다고 하는데 이런 부분에서 잔혹함 그 자체를 제대로 표현했을테니 어색함 없는 잔인함을 보였겠지만 연극에서 그것이 표현하기도 어려울테고 이것만 가지고 이 연극 전체를 이해할수도 없기때문에 꽤나 재미를 찾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다만 학원폭력에서 욕은 제대로 참 많이 나온다. 도입부에 사람을 거꾸로 매달고 목을 긋는 그것과 같이 학폭도 그런식으로 잔인하게 묘사됬더라면 어땠을까.. 엄한곳에서 피를 떡칠하지말고(피는 엄청 효과적으로 잘 쓴거 같음) 이런 현실 묘사에서도 좀 신경 썼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쉽다.
그리고 마지막에 모르스부호로 뭐라 보내니 엘리도 뭐라 답장한다. 무슨 내용인가 찾아보니 '키스'라는 문자를 모르스부호로 보낸것이라고 나온다.(연극 말고 인터넷으로 찾은 내용) 자막이라도 올리던가.. 감독이 한국사람은 모두 모르스부호를 알것이라 생각한것일까? 아니면 그냥 모르면 모르는대로 넘어가라. 라며 무시한건가? 아니면 또라이인가? 참.. 그지같은 결론이었다. 당시 그 부호가 키스 란것을 알았다면 조금이라도 애뜻함이 바닥에 깔리는 맛이 있었을텐데.
전체적으로 배우들의 디테일함이 대단히 모잘라서 아니 전혀 안보여서 아니 전혀 표현되지 않아서 연극 자체가 밍밍하고 배경지식이 있더라도 무엇인가 흡혈귀따위로 현실도피하는 것은 한국인 정서에 맞아보이지도 않는다. 각종 무대장치들을 보면 돈 아깝지 않다고 느낄수도 있지만 연극이란게 영화와 다르게 좀더 인간 내면을 파고드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꽤나 엉성한 연극이었다.(내용상 영화나 드라마는 완전히 다른 감동이 올거 같음) 이런걸 왜 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국립극장에서 하는건지.. 가격도 10만원씩이나 하는 재미없는 연극을.. 국립이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상대적으로 좀 저렴한 금액대의 공연을 해줘야 하는거 아닌가? 내 욕심인가?
언제부턴가 세금으로 건설되고 운영되는 국공립시설들이 돈벌이에 혈안이 된거 같아 안타깝다. 특히 '예술의 전당'은 '돈의 전당'같아서 개같은 기분을 느낀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아무튼 이 돈 주고 보라곤 차마 말 못하겠다. 차라리 드라마 '트와일라잇'이 영화 '뱀파이어와 인터뷰'를 치맥과 보는게 백만배는 재미있을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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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치백(hunchback)이 무슨 의미인가 싶었더니 곱추(등이 굽은 사람)라는 의미라 한다. 그러면 제목 옆이라거나 팜플랫같은 곳에 좀 적어놓으면 제목만으로 10% 이상은 이해됬을텐데
신기하다 프로그램 종이에 맹인용 점자가 함께 박혀있다. 내가 노안이라 그런지 이 점자때문에 극도로 읽기가 힘들었다. 누구를 위한 점자였을까.. 맹인용 점자라면 이런 프로그램 위에 점자를 박지 말고 별도 종이에 점자를 받으면 안되는 거였을까.. 분명히 이렇게 하고 잘했다며 스스로 우쭐했을거 같은데
일본 작품들을 보면 한국보단 성적 묘사나 심리 묘사가 훨씬 자유롭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책 내용에 아이를 임신해서 중절수술 하고 싶다고 당당히 적혀있다면 장애자는 커녕 장애자할아버지라도 온갖 지랄들이 판쳤을거다. 특히 일부 종교계에서 더욱더 지랄발광을 했겠지..
하지만 일본것이라 그런지 조용하다. 일본은 원래 이런 애들이라 조용한게 아니라.. 우리보다 힘이 쌜거 같아서 조용히 있는게지..
마침 요즘 고마광수 교수 책을 읽고 있는데 성에 대해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큰 억압을 해대고 있는지 꼬집는 부분이 많이 나오는데 이 연극을 보니 일본 특유의 성적 관대함(실제로 그런지 모르겠음)은 한편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현의 자유에서 실제로 몸이 불편한 이치카와 사오의 작품으로 자신의 현실을 적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직접 처한 현실과 멀진 않을것이란 생각과 직면한 현실에 대한 긒은 고뇌를 드러낸다.
그런데 이 연극은 한 사람의 독백을 여러사람이 나눠서 이야기 하고 설명하고 키가 좀 작은 왜소증인 분도 나오고. 이렇게 여러사람이 한사람의 심정을 대변하다보니 생각보다 집중도가 대단히 떨어진다. 차라리 모노드라마로 등장인물을 모두 한 배우가 상황 설명으로 하는게 더 극적이지 않았을까? 좀더 절망스럽거나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란 생각이 든다.
달오름 극장이 큰 극장이긴 하지만 또 그렇게 엄청난 크기도 아닌데 배우와 이상스럽게 멀게느껴지는 구성도 공감대를 해치는 요소로 작용하는데 왜 멀게 느껴졌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무대가 산만하고 어지러운 딴 세상 같았다. 다나카준(?)이라는 요양보호사(?)같은 남성은 샤카를 놓고 왜 비아냥 거렸을까? 단순히 장애자를 비하하는거 같진 않고 샤카가 그동안 자신의 심정들을 올려놨던 SNS를 보며 생겨난 감정같은데 연극보단 아무래도 책을 보는게 좀더 구체적으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듯 하지만 아무튼 이 사람의 행동은 별로 이해되지도 않고 이유도 모르겠다.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은 몸에 생긴 장애로 인한 열등함은 생존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고 전쟁을 오랫동안 한 일본에선 우생을 우대하겠다는 신기한 발상도 나올법하긴 한데 이런부분은 무언인가 옛 한국과는 크게 맞지 않는 정서같다. 지금 한국의 일부에서는 우열을 철저하게 나누려는 병신같은 시도도 있기때문에 저들의 저런 황당한 정책을 미개하다고 치부하기도 어려운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성소수자들을 이유없이 비난하는 자들이나 몸이 불편한 사람을 멸시하는 것이나..
다만 성소수자들은 감추면 완벽에 가깝게 타인이 모르도록 할 수 있지만 지체장애자들은 그것이 안되기때문에 사람들의 잘못된 시선은 비수가 될수 있고 행동을 왜곡시킬수 있다.
작가는 이걸 말하고 싶었을까? 고급 창부가 되고 싶고 아이를 임신해서 중절 수술을 하고 싶다는 뭔가 한국적이지 않은 발상을 하는 저 일본인은 일본사회에서 대수롭지 않은지 모르는 저런 일들이 저 사람에겐 간절하고 사무치는 염원이었을까..
인간의 상상력이 성적 묘사로 꼿히기 시작하면 그 끝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그 한계를 보여주진 못한다. 연극도 그렇고 읽진 않았지만 책도 그럴것이다. 이들에게 현자타임(절정 이후 평온하고 무기력하며 안정된 상태?)은 어느 꼭지점을 찍어야 가능한지 모르지만 요즘들어선 내 뇌의 농락에 내가 놀아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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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번주 추위가 이번 겨울의 마지막 추위일것으로 예상된다. 왜냐하면 다음주가 입춘이니 늦추위라고 해봐야 거기서 거기겠지 폭설주의보니 뭐니 잔뜩 겁만 주더니 서울은 그다지 많이 내린거 같지도 않다. 연극이 끝난 후 남산을 올라갔지만 역시나 많이 쌓인 곳은 없었다. 이번 겨울은 이사하기 며칠전에 내린 것 빼곤 항상 우산을 써야 할정도 외엔 없던거 같은데 이렇게 끝나려나..
붉은 낙엽은 붉다의 의미와 가을이 갖는 두가지 각각의 상징을 뜻하는걸까.. 희망이 없는 가을.(겨울은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봄이라는 설램)
뭔가 불필요할정도로 많은 나래이션이 거슬린다. 너무 많은 설명구들 없어선 안될 것들을 넣은것이겠지만 소설을 희곡으로 바꾸다보니 생겨난 현상인지 아무튼 시작부터 장구한 나래이션때문에 신경쓰인다.
가족관계를 인식하는 당사들의 오만함을 이야기 하는것일까? 왜 가족들간엔 거짓이 있어서는 안된다고들 생각하는걸까? 특히 부모 자식간엔 더욱더 강요당한다. 어차피 무시,괄시하는 그 최전선에 있는것이 가족 아니었나? 그러니 예수도 고향을 가기 싫어했겠지
이런 환상속 갇혀살아가는 가족간의 근원적인 불신의 벽을 이야기 하는거 같다. 아무리 혈연관계라 할지라도 일단 금이 생겨 벌어지기 시작하면 타인보다 더 무서워질수 있다는 것을 강렬하며 집요하게 파헤친다. 고통받는 쪽은 대부분 힘없는 부류. 소외계층, 선입견의 대상, 힘없는 자, 사회적 보호 제외대상자들 등
이러한 갈등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땐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을땐 무엇보다도 잔인하게 표출되는데 첫 대상으로 형인 워렌과 아버지인 빅터에게 화살이 쏘아진다. 색안경의 주된 요인은 과거에 대한 자신만의 기억들. 하지만 정확한 정보가 들어있지 않아보인다. 단지 스스로의 추정만으로 모두에게 칼을 꼿는다. 때론 스스로에게도 꼿는 어리석음을 보이지만 이것은 가족관계 특유의 오만함으로 '너는 모르는게 낫다'라는 특이한 논리로 한사람을 평생 바보로 만드는 단편을 보여준다. 그럴거면 죽을때까지 입밖으로 꺼내지 말던가. 몇마디 말에 욱!해서 모두 털어놓는걸 보면 인간의 나약함인지 관계의 빈약함인지.
아직 미성숙된 자식에게도 여지없다. 답을 정해놓고 취조하듯 물어보는 부모의 태도를 보고 진실을 말한다고 진실로 받아드려질까싶다만 그럼에도 자신의 진정성을 받아주기 바라는 지미(자식)의 심정은 벽에다 자신을 변호함과 별반 다름없는 답답함을 보여준다.
이 연극에서는 엄마는 오히려 큰 비중이 있는것은 아니다. 어떤 일부 사건의 소재로서만 활용될뿐이고 에릭(아버지)의 현상을 위한 소재로만 활용되기때문에 다른 역할로 대처되도 극의 흐름에 큰 문제가 될거같아보이진 않는다.
실종아이의 엄마인 카렌도 극 전체에서 의미가 커보이지 않는다. 오죽하면 실종아이를 찾았음에도 대충 몇마디로 모두 끝내버리고 수십년 후 다 큰 성인이 되어 에릭을 찾아오는거로 마무리 될정도다.
에릭의 나래이션(독백아님)으로 시작해서 에릭으로 끝나는 연극으로 한 인물의 부족한 정보, 왜곡된 기억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파멸시킨 인물에 대한 내용이지만 전체적으로 흐름은 진부하다. 일단 전개가 그다지 신선하지 않다. 이 소설이 나온지 오래된것도 아니니 지면으로 보면 좀더 구체적인 묘사들로 추리물의 면모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장르가 추리소설인가?) 연극은 특별한 긴장감이 있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그래서 중간무렵부턴 졸음이 밀려온다. 졸 정도로 심하짐는 않았지만 30분정도는 졸렸던거 같다.
좀더 극적으로 만들수도 있지 않은가? 그 피자배달하는 놈은 뭔지. 형인 워렌의 진실은 무엇인지 도데체 카렌은 어떤 확신으로 그와같은 결론에 치닫게 된건지. 에릭을 대학 보내기 위해 자해를 했다는데 보험금을 전혀 못받았던 가난한 가정에서 에릭은 어떻게 대학을 간걸까?
소설 원본에도 이와같이 막 건너뛴건가? 아니면 연극에서 모두 잘라버린건가? 불신의 끝으로 엄한사람들의 파멸만을 이끈다고 하기엔 지미나 카렌은 다른 갈래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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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일이 있어서 특근 아닌 특근을 하게 됬다. 너댓시간 있으니 졸리워 회사의자에 앉아 수십분 졸음 하지만 이상하게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 뭘 그리 힘든 삶을 산다고 피로가 풀리지 않을까 신사동에서 이사하기 전에 첫눈이 많이 내려서 무척 기뻤는데 그 후론 눈다운 눈을 서울에서 본 적이 없다. 약간 흣날린정도. 오늘도 청명하고 싸늘하고 냉정한 하늘만 무심하다. 춥지만 막상 겨울옷을 꺼내 입기엔 무엇인가 내키질 않아서 아직도 늦가을 옷에 조끼 한개를 껴입고 다니니 올 겨울은 다른 해보다 조금 더 춥게 다가오는거 같다.
송년판소리는 안숙선 명창의 독무대같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번이 두번째 공연을 보는것이지만 특이하긴 하다. 이 좋은 무대를 오래도록 왜 이분의 정기 공연장이 되었을까? 그런데 오늘은 좀 다르다. 무엇인가 분위기가 기념하는듯한 약간은 침침한 분위기
시작부터 홀로그램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홀로그램이 아닌거 같은데 왜 홀로그램이라하는지) 며칠전 찍은 안숙선명창의 저장 판소리를 틀어준다. 왜 이랬을까? 그냥 명창께서 나와서 직접 불러주시지 이상한 퍼포먼스는 왜 하는걸까?란 의문이 들다가 문득 '안숙선명창께서 연세때문에 이제는 더이상 창을 못하실정도가 되셨나?'란 약간의 불안한 기분이 감돈다. 2년전인가 3년전이가 그때 송년판소리엔 그래도 건강하셨던거 같은데..
아무튼 1부 한시간 무대는 이렇게 불안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제자분들이 나와서 모든 공연을 했다. 안숙선명창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와중에 '사랑가'는 왠지 좀 그랬다. 손녀라고 하는데.... 아무리 같은 길을 나섰다곤 하지만 어설프디 어설픈.. 이런 좋은 무대를 손녀라는 이유로? 그냥 예쁘고 귀여운 꼬맹이정도던데. 다른 훌륭한 제자들이 많고 많을텐데 뭔가 아쉽고 섭섭한 무대였다. 나머지 모든 공연은 말하면 입아픈 멋진 공연으로 평생을 몸바친 말 그대로 전무가들의 공연이니 아무리 못해도 프로패셔날 그 자체다.
새타령과 추월만정은 왜 그리도 슬픈지.. 눈물이 잘 나는 편이 아닌데 눈꼬리가 쓰라리다.
피날레는 역시 마지막 단원인 안숙선 명창의 명예로운 상패수여식을 하는데 재자들이 부축이며 나오는 모습에 아~ 내년 연말엔 뵐수 있으려나.. 안타까움과 속상함이 반복된다. 그럼에도 민요 몇 소절 하실때에는 쩌렁쩌렁 하신것을 봐서는 소리에 대한 열정과 애정만큼은 그대로인듯 싶다.
조금 힘드셨어도 앉아서도 좋으니 판소리 한두대목 해주셨면 어땠을까란 안타까움도 든다. 관객인 나를 위함이 아니라 소리로 평생을 관객과 함께한 안숙선명창 그 자신을 증명하기 위함의 무대로서
한편으론 다행이라고 할까? 안숙선명창은 수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두셔서 외롭지 않으시겠단 안도가 든다. 아직도 충격적인 기억으로 공옥진여사 말년 다큐멘터리가 떠오른다. 예인의 안타까움일지 시대와 맞지 않아 대중으로부터 냉정하게 버림받은 예인의 마지막 모습 문화예술이란게 때론 냉정하게 내동댕이 쳐지기도 하기때문에 때때로 모르게 사라진 기억의 인물들의 안타까움이 먼저 떠오르기때문에 안타까움이 버릇처럼 앞장서지만 역시나 안숙선명창은 그렇지는 않을거 같은 생각이다.
TV나 우연히 알게 되어 팬이 되었던 그런 사람이 평생 몇이나 된다고 이제는 슬슬 명을 달리하시는데 이건 내가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말이 되지만 그럼에도 오늘 공연에서 제자들이 부추겨 나오시고 부채를 한 손으로 펼 힘도 없으셔서 양손으로 힘겹게 펼치시고 제자들과 민요를 맞추시는 안숙선명창을 보고있노라면 한사람 인생의 끝자락은 어떤 환경이나 어떤 상황이라도 기쁘게 맞아주긴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오늘 공연은 눈꼬리에서 눈물이 마르질 못했던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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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많이 오내, 폭설 경고 어쩌구 저쩌구 해서 주머니에 우산 한개 챙겼는데 눈은 커녕 하늘만 맑다. 도데체 어느지역에 눈이 내렸다는 건지 그래도 겨울이라고 날은 제법 추운데 이 추세라면 올해는 늦가을용 외투 하나로 버틸지도 모르겠다. 회사원이란게 그렇듯 추울때는 출퇴근 단 몇십분정도 외엔 항상 쾌적한 사무실에서 일을 하니 겨울임에도 겨울옷이 필요하진 않다. 물론 여름도 마찬가지
국립극장은 항상 느끼지만 전체적으로 음향은 정말 끝내주는거 같다. 감동의 큰 부분을 음향으로 먹고들어간다.
묵향도 그렇고 오늘 공연인 향연도 그렇고 과연 이 공연은, 이 춤은, 이 음악은, 이 무대는 고전의 그것이라 할수 있는가란 의문이 든다. 과연 이 공연에서 고풍스럽다는 것을 느낄수 있을까? 지금의 공연 예술장르의 한가지가 아닐까? 전통예술이 아니라 현대 예술의 한 장르로 만들어버린 공연같다. 저들의 공연은 세련됬고 웅장하며 장엄하다. 그러면서도 한국 특유의 섬세함도 계승하고 있다. 단지 과거 한국 공연예술의 뿌리만 이어받았을뿐 완전히 새롭게 보이는 이 무대는 항상 감동의 물결이다.
뛰어난 색체, 현대화된 무대 디자인 그리고 공연과의 연결 단순히 공연을 보는것이 아닌 무대 전체 속에 춤을 추는 예술인 있고 그림이 있고 빛이 있고 음악과 소리가 있다. 무엇하나 빠질수 없는 뛰어난 구성과 연출이 아닐수 없다. 사계절 속 각각의 색체가 돋보이는데 바라춤에서 바라를 크롬같은 색으로 바꾼것만으로 신선함 그 자체 (누런 놋쇠나 은빛 색이나 그냥 쇠의 색이 그러한건데 왜 그렇게 다른게 느껴지는걸까? 그리고 그동안은 왜 안바꾼것일까?)
장구춤이나 소고, 오고무 같은건 기본적으로 화려하지만 연출이 돋보인다. 오고무는 무대가 계속해서 회전하니 긴장감이 한층 가중되는 느낌까지 든다. 소고는 말이 소고지 비보이 무대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뒤집어놔도 되는건가? ^_^)
진쇠춤이란건 원래 있었나? 꽹가리를 저리도 젊잖게 치다니.. 꽹가리는 늘 귀가 아파왔었는데 이토록 매혹적인 춤의 도구가 된다는 것도 신기하다.
국립국악원은 고전을 최대한 살리려 하는 느낌이 있다면 국립극장쪽은 그것을 최대한 뒤집어놔서 현대의 한국 미를 극단적으로 끌어올리려는거 같다. 양쪽 모두 뿌리는 한국에서 이어져온 그 무엇이겠지만 두 극장측의 지향점이 다른것은 관객 입장에서 기분에 따라 입맛에 따라 어느것을 선택해도 좋은 선택일수밖에 없는 상황은 행복하지 않을수 없다.
100분 공연이라는데 4막으로 나누고 각각 3편정도로 나눠서 지루할 틈이 없다.
낡은 책방의 곰팡내가 정감있어 좋지만 때론 교보문고에서 풍기는 책과 향수 냄새 그리고 은은히 퍼지는 클래식과 현대적 시설들이 탐날때도 있듯 지금의 시선에 맞게 바꿔놓은 이런 공연이 무척이나 반갑게 느껴진다. 흔하지 않지만 뭔가 익숙함과 친숙함, 어릴적 할머니 손잡고 약장수 공연 보러갔던 그리움도..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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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연휴가 시작되었다. 추석연휴때라면 저녁에는 싸늘해야 하는데 아직도 덥다. 9월에 열대야도 있다고 하니 지구가 더워지긴 했나본데 북쪽으로 이사해야 할까
변강쇠 점 찍고 옹녀? 변강쇠.옹녀 이렇게 표현되는건가? 포스터를 봐도 그렇고 한국사회에서 변강쇠, 옹녀의 이미지는 코미디언에 가까운 캐릭터이다. 전례된 내용의 변강쇠는 동내 양아치 같은 존재랄까? 물론 섹스를 좋아하고 잘(?)했는지 여자들도 많이 따른거 같다. 다만 영화나 기타 매체에서 변강쇠는 오직 섹스에만 몰빵한 단순한 캐릭터에 오줌발(?) 미친 그런정도?
변강쇠전의 옹녀는 청상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남편들이 모두 죽는다. 그지같은 말중에 "남편 잡아먹는 년"이란 말이 이런곳에서 나온 것일텐데 이제는 살아져야 할 말들이지만 우수갯소리로 지나가듯 말하는 것은 아직도 남아있는거 같다. (현대극에선 완전히 없어져야 될 말같은데)
아무튼 창극은 옹녀의 등장부터 시작한다. 물론 남편들이 죽어난다. 여차저차한 사연으로 몇명이 죽고 동내 남자들이 가만두질 않았는데 그러다보니 이들도 다 죽어나서 월경촌이 과부촌이 되기직전 그녀는 마을에서 쫓겨난다. 여기까지 옹녀의 바탕이 되는 고난이 나오는데 이상하게 너무 서글펐다. 저 여자의 바람은 한사람과 백년해로하겠다는 대단하지 않은것인데 그게 안되서 결국 저지경까지 몰린것 아닌가. 아마도 죽은 남자들만이 저 여자의 순수성을 이해줄수 있었을것이다. 옹녀의 노랫가락이 너무 슬펐지만 장르가 코미디인지라 눈시울을 닦아낼수밖에 없었다. 한국 노랫가락들이 전반적으로 너무 슬프기도해서 가슴속 깊이 끌어내는 비극으로 만들어도 가능할법한데 '눈물없인 볼 수 없는 옹녀전' 뭐 이런? 언젠가 볼수 있으려나.. ^_^
그렇게 유량민이 되어 어디론가 떠나가다 변강쇠를 만난다. 변강쇠는 동내양아치마냥 놀고 먹고 여자들과 하룻밤 정을 통하고 또 다른곳 가서 그렇게 놀고 먹는다. 어떻게 돈도 안벌고 그럴수 있는지 조선후기땐 지금 한국보다 복지가 좋았던건지 여자들이 먹여살린건지 아무튼 부러운 능력이다. 옹녀와 변강쇠가 만나 부부의 정을 통할땐 온천지가 요동치내마내 하지만 영화같이 웃긴 장면들이 묘사되진 않는다. (천지가 흔들리고 땅이 갈라지고 오줌싸면 태양을 식히고)
아무튼 전례되는 내용도 그렇고 이들은 분명 남다른 성기를 지니고 있었던지 그 묘사들이 기묘하다. 하지만 알아들을수 없다. 어느시절 말인지 한문인지 뭔지 자막을 봐도 모르겠다. 은유인거 같긴 한데 단어의 표면적 의미도 모르겠으니 이게 말장난인지 학술적 용어인지 뭔지.. 전라도 사람들은 알아듣나? 나만 못알아듣고 있는건가?
이렇게 물고 빨고를 어느정도 그러다가(얼마나 그런건지 모르지만 짧은 시간은 아닌거 같은데 이 사람들은 밥 안먹고도 가능한건가?) 마을로 내려가 정착하려고 했으나 양아치인 변강쇠가 일을 할턱이 없지 않은가. 결국 옹녀만 뼈빠지게 일을 하며 변강쇠를 먹여살리다가 결국은 지리산 어디론가 들어간다. 변강쇠전은 유량민들의 고단함을 표현하기도한다지만 이 극에서는 그러한 것이 표현되지 않는다. 게으른 한 사람과 사랑이란 이름으로 그 사람을 먹여살리기 위한 한 사람 그렇지만 그 게으른 변강쇠도 옹녀말을 안듣는것은 아니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라도 조금은 하려 했으니.
원작은 변강쇠가 저주를 내려서 옹녀가 재혼도 못하다가 힘들게 풀렸다곤 하지만 이 극은 전체적으로 둘의 사랑만큼은 애틋하게 표현된다. 변강쇠는 죽어서도 옹녀를 그리워 하고 옹녀는 변강쇠가 죽을때까지도 온갖노력을 하고 변강쇠가 죽어서도 장승들을 죽여가며 변강쇠를 되찾으려 애쓴다. 죽은 사람을 살릴수 없지만 적당한 해피엔딩으로 코미디 장르에 맞도록 그럭저럭 각색되어있다. 일반적인 코미디장르가 그러하듯 다 보고 나면 남는게 별로 없다. 해학적인 블랙코미디는 좀 다르겠지만 아무튼 그냥 남는거 없는게 코미디란 장르다. 스트레스 해소는 되었을라나..
사람들마다 취향이란게 있으니 이 극의 표현을 놓고 뭐라 하긴 그런데 전체적으로 말장난들의 연속이다. 그로인한 웃음이 나오는것은 좋지만 아쉬움이라면 해학적인 블랙코미디 요소는 찾아보기 힘들다는것이다. 요즘 다시 부활한 개그콘서트란걸 보면 시대를 반영한 정치.사회풍자는 오간데 없이 상대방 외모비하로 웃겨먹는 코미디의 기술 중 가장 천박함만이 보여서 못보겠던데 이 작품도 그런 느낌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10년전에 만들고 시대상을 반영하며 바뀌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울궈먹고 또 울궈먹고 또 울궈먹으니 그런것이겠지만 과연 변강쇠전이란게 처음 나왔을때 단순히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대중예술로 탄생했을까?란 생각은 한번쯤 해보는것도 나쁘지 않아보인다.
그리고 항상 느끼는 거지만 한국의 전통 창 발성은 떼창에 과연 어울리는가?이다. 특히 국악기를 서양악기들마냥 세팅하고 마치 오페라를 연상시키듯 떼창을 하려면 오페라나 대형뮤치컬들 처럼 화음을 좀 맞추고 나눠서 전체가 하나처럼 들리면서도 복잡함이 섞인 심정을 표현하면 좋지만 그런것은 없다. 혼자 부르는건 심금을 울려서 사람 미치만드는데 떼창은 정신산만하고 시끄러워 소음처럼 다가온다. 좋은 청력에 절대음감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이 이런 음악을 들으면 미쳐버릴지도 모를일이다. 떼창때만큼은 발성을 좀 현대적으로 바꾸고 음을 좀 나눠서 화성(和聲)이란걸 좀 셋팅하면 어떨까 싶다. 솔직히 떼창때는 짧은 시간이라도 너무 힘들었다.
국악의 고질적으로 섭섭했던것은 고작 10년된 따끈따끈한 신작인데 자막을 보지 않으면 문장 한개도 제대로 듣기어렵다는 것이다. 옹녀는 북쪽 사람인데 왜 전라도 사투리를 써대고 있냐? 단어들도 좀 현대적으로 만들고 딕션좋게 만들어 자막을 안보고 배우들의 표정을 보며 바로 알아들을수 있으면 좋겠지만 머나먼 미래의 얘기다. 어쩌면 구글 통역기를 켜놓고 듣는 시대가 먼저 올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때쯤이면 한국악은 사라지고 유물로나 남아있겠지. 적어도 지금처럼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정도라면 그리고 자막은 좀 중앙에 넣어라.. 눈 사시되게 무대 밖 양쪽에 넣지 말고. 사이코페스도 아니고 왜 관객에게 이런고통을 주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무대 밖 양쪽 모니터에 자막을 쳐까는걸 보면 욕이 안나올수가 없다.
그런데 옹녀의 소리는 왜 그렇게 슬펐을까. 그냥 너무 슬펐다. 가을엔 마냥 즐거운 그런것을 봐야 할까보다.
출연 : 이소연,최호성,김차경,우지용,김금미,이영태,나윤영,이광복,윤충일 외 국립창극단 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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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장마시작이라 하늘이 무겁다. 그런데 우산을 안가져오다니 평상시엔 한번 안쓰는 우산을 꼭 가지고 다녔는데 정작 필요한때에는 없다. 다행이도 집에 올때까지 비가 오진 않았지만 밖에 있을땐 계속 불안
햇살은 구름뒤로 물러나고 바람불어 시원한 기분도 들지만 다가오고 있는 습함은 답답함을 만들어내는데 이번 장마가 끝나고 한달정도 지나면 설래는 시절이 다가오겠지.
제목이 신선인데 神仙 이걸 말하는 건지 新線(new line?)을 말하는건지.. 특이하게도 무용공연인데 나레이션이 짧게 있다. 여기선 새로운 선을 만들어간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면 우리가 흔히 아는 수염 허연 늙은 도사를 말하는건 아닌거 같고 신세대같은 그런 의미의 신선(지금은 잘못 사용하고 있는 신파 같은)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건가
공연을 보면 산속에 사는 늙은 도사를 뜻하는것으로 보이진 않고 세로운 줄기를 뜻하는거 같기도 하다. 물론 저들의 아름다운 춤사위가 그렇다는거다.
술을 연결시킨 한국의 춤? 포스터는 술취해 꼬장 부리는 사람처럼 보여서 코믹 공연인가 싶었다. 어떡게 이런 포스터를 기획했을까? 영화 '지구를 지켜라' 같이 포스터때문에 망할거 같은 기분이 마구잡이로 든다. 공연보다 멋진 포스터는 기본아닌가. 포스터 기획좀 잘 하자.
시작은 가끔 연극에서 보이는 암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용수들이 나와서 연습하듯 시작한다. 춤공연에서는 흔하지 않지만 뭐 기획의도까지는 궁금하지 않은 시작
아~ 강하게 빠져든다. 무엇인가 주제가 있어보이지만 크게 신경쓰이지도 않고 저들의 신선을 감상해본다. 자유분방한듯 하지만 강하게 묶여있는 팀원들의 신뢰라 해야 할지 각자의 역활에 충실해도 서로가 필요할땐 일순간에 하나가 된다.
저들의 손끝부터 발끝까지 자유롭게 흩날리는 바람 속 민들레 홀씨 같지만 그 속에는 분명한 의지가 담겨있고 또한 쾌락과 희열, 환희가 녹아 흘러 넘친다.
비극적이거나 슬픔을 담고 있는것은 아니라서 무용수들의 즐거움과 퍼커션, 가야금 연주자 들 모두 신바람에 모든것을 맏기듯 들썩거리는 기운에 나 역시 동화되지만 추임새가 익숙하지도 않고 관객 분위기는 어떤놈이 "얼름!"을 외치고 "땡!"을 안하고 혼자 집에 간것마냥 싸늘하지만 속내에선 뭔가 울컥울컥하는 아쉬운 공연이다.
어느때부턴가 한국 공연에서 추임새(관객의 호응?)가 모두 사라져가고 있는데 필요한 공연마져 사라지니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 같다고 할까. 한편으로 공허함이 느껴진다. 저들은 저리도 엄청난 무대를 만들어가는데 관객은 멍~ 하니 그 어떤 호응도 없다.
관객이 쥐죽은듯 조용해야 하는 공연이 현대사회에선 대부분이긴 한데 한국 전통 공연은 무언가 서로 주고 받는게 확실해야 할거 같은 줄다리기같은 알싸함이 있다. 판소리나 민요 등 노랫가락이나 순수하게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공연은 분명히 추임새를 넣는 사람들이 있고 또 그것을 유도하기도 해서 관객이 멋쩍어하면서도 따라하게 되어 한국 전통 공연의 꽉 찬 맛을 느끼게 하는데 과거와 현대를 섞은 이런 공연은 이도저도 만들어가질 못하는 면이 있다. 철저하게 보기만 하도록 그에 맞는 리듬과 구성을 만들던가 아니면 나같이 뻘쭘해 하는 관객을 위해 이럴땐 추임새를 넣도록 강요(?)해서라도 빈곳을 채워가게 해야 하는데
노련한 국악인들은 관객과 대화도 좀 하면서 분위기도 잡아주고 서로 호흥해주고 격려해주고 그러는데 오늘같이 뛰어난 우리 한국의 무용수들은 그것이 좀 약해보인다. 어쩌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것이 한국의 현대공연예술을 휘어잡는 예술가 되는 지름길이 아닐까싶다.
한국 리듬이 어깨를 들썩들썩거리게 하는 마력이 좀 있다보니 관객의 추임새가 더욱더 크게 느껴지긴 하지만 저 젊고 뛰어난 무용수들께서 강렬하면서 집착에 가까운 세밀한 춤사위로 나의 오감을 모두 사로 잡는다. 이토록 강렬한 형이상학적 쾌감을 느껴본적이 얼마만일까..
분명한것은 내가 한국사람이고 저들의 공연이 한국적이라서가 아니라 피땀을 흘리며 연습한 노력과 녹여내고 있는 열정과 정렬 그리고 이 순간 공연하고 있는 저들의 미래 때문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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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순간부터 내가 나이먹는 다는것을 느끼기 시작한거 같다. 허리가 아퍼서 누워있기도 하고 허벅지안쪽 신경통이 더 심해지기도 하고 병원신세도 졌고 난생 처음 119도 불러봤다. 이것때문만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공연이 죽음에 관련된것들을 본의아니게 많이 고르게 된다. (본의 아니라는것은 크게 신경 안쓰고 포스터정도만 보고 고르는데 이러함)
이번 사자의 서 역시도 그렇다. 사람의 죽음과 저승에서의 심판(이건 좀 상투적인 설정이라 좀 달라질때가 되지 않았나)
국립극장을 오면 자꾸 국립국악원이 생각난다. 비슷해보이는데 이상하게 음향이 너무 다르다.
국립국악원은 소리의 조화가 영 별로인 반면에 국립극장은 웅장하면서 섬세함 그 자체다. 해오름, 달오름, 하늘극장 모두 뛰어난데 국립국악원의 우면당, 예악당, 풍류사랑방 모두 별로다. 왜 그럴까.
오늘은 맨앞자리라서 보는것은 조금 불편했지만 소리만큼은 일품이었다. 물론 공연도 일품이었다.
국립무용단은 원래 다(?) 하는건가? 현대무용, 한국무용 이것 저것 다 국립무용단이라고 적힌거 같던데 국립현대무용단, 국립고전무용단 뭐 이런식이 아니 그냥 퉁쳐서 국립무용단?
과연 오늘 공연이 한국무용이었을까?란 생각도 든다. 전위적이며 추상적인 저들의 표현은 옛부터 내려온 춤이라 하기엔 너무 현대스럽고 서양스럽다. 음악도 무척 세련된것이 국악이라 하기에도 좀. 오히려 한국 장단이 중간에 무용으로 표현되는데 결이 좀 맞지 않아 어색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나는 이해하긴 어려웠다. 무용을 많이 접해본적도 없고 직관적인 표현의 형태인 무용(발레같은?)이라면 그다지 부담없겠지만 현대무용의 그 전위적 형태를 이해하기엔 어려움이 크다. 현대 예술이 전반적으로 극단적인 추상화를 극대화 하는거 같기도 하고 근본적인 원인은 내 이해력이 심각하게 달려서 그런것이겠지만 이해 안되는걸 어떡하겠나.
하지만 이렇게 난해한 부분은 1장(총 3장)에 일부분 국한된것으로 봐야 할거 같다. 2장부터는 과거를 회상하는 것인데 별다르게 이해 안될것도 없고 특이한것도 없다. 진부한 사랑 전개와 미칠듯한 외로움만이 남겨지는 암흑의 고요함같다고 할까 (연극 와일더의 '우리읍내' 같이 불꽃 튀다가 사그러들어 천천히 어두워지는 희나리 같이 식상한 전개)
70분정도의 짧은 공연이고 3장으로 의식의 바다, 상념의 바다, 고요의 바다 식으로 거창하게 적어놨지만 1장은 사후의 심판, 2장은 과거청년기, 3장은 죽음과 남겨진 자 정도로 2,3장은 망자의 일생을 이야기 하는데 1장의 비장함같은것은 느껴지지 않지만 연인들의 설렘과 마지막 죽음에 대한 절망뒤 잇는 고요함은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그렇지만 중간쯤 살짝 졸음이.. 짧은 공연이라서 졸음이 올거라곤 생각못했지만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잠도 충분히 잤는데.
그리고 표현이 일부분에선 산만하다. 많은 무용수들이 나와서 군무아닌 군무를 선보이지만 사람의 어지러움을 표현하려고 다들 저렇게 다른 표현들로 누구에게도 시선을 줄수 없도록 만드는건지 꼭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야만 했던것인지
어떤부분은 망원경을 들고 보고 싶을정도로 집중하게 만들지만 어떤부분은 하품을 참아야 한는 부분도 있고 어떤부분은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란 생각만 머리속에 가득찰때도 있는 짧지만 다양한 감정(?)이 들게 하는 공연이었다.
이상하게 점점 무용이 좋아지고 있는데 괜찮은건지.. 올해는 서양고전음악쪽으로 좀 집중하려 했는데.. 내년으로 미뤄야 하나. 한창 귀가 예민해져서 음악이 딱 좋은 해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