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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하남에 있다는 것은 서울에서 하는 평일 저녁 공연을 보기쉽지 않다는 의미일 수 있다. 오후 7시 30분 공연이고 서울 중간쯤 위치한 남산의 공연장 하지만 하남에서는 2시간이상 걸린다. 그럼에도 이렇게 계속 본다는건 갈땐 괴로워도 공연이 끝나고 나올땐 흐믓하기때문이겠지
2025년 마지막 날의 공연이니 조금더 기대됬다. 저들은 프로기때문에 특별한 날이라고 공연이 더 좋다거나 하면 안되지만 아무튼 관객입장에서 기대하는건 어쩔수 없나보다.
'어질더질'의 뜻이 소리꾼들이 이제 지쳤으니 그만하고자 할때 하는 말이라는데 실제로 들어본 기억은 없다. 마무리를 위해 이쯤에서 2025년 국립창극단 공연은 끝이란 소린지 2025년까지만 창극단 단원생활을 하는(정년퇴임 두명, 자발 퇴사 두명)사람들의 끝이 있어서 하는 소린지 (이 공연을 이번만 한것은 아닐테니 그냥 한해를 마무리 한다는 의미로 보면 될듯)
한국에서 국립이 운영하는 극단은 몇개나 되는걸까? 인원수도 제법 많아보이는데 각 지역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예술단체를 모두 포함하면 제법 사람들이 되지 않을까? 특히나 한국에서 국악은 인기가 무척 없기때문에 국가가 운영하지 않으면 진작에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오늘 정년 퇴임을 맞는 두명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걸까? 선생으로서 예능인으로서 나머지 생을 지금과 같이 살아갈수 있는걸까? 그렇다고 정년을 늦추자니 젊은 세대들의 자리가 없어지고.. 참 난감하다. 당사자들은 더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는데. 강제로 나가야 한다니.. (외국은 일본정도 그 외 나라에는 법으로 강제한다기 보단 연금 수령년도와 연계와 강제 퇴사 금지정도)
아무튼 공연은 사랑, 운명, 해학, 악, 비극 큰 주제를 놓고 여기에 해당됬던 창극들의 한 대목들을 발취해서 공연을 한다. 그래서 제법 가짓수가 된다. 이중에 내가 본건 몇편 안되는거 같다. 창극단이 이렇게 많은 공연들을 하는지도 몰랐지만 목록을 보면 관심이 가는 창극이라 하면 만신 정도가 좀 보고 싶다는 정도랄까..(2026년도 하려나.)
창극 갈라쇼같이 주제에 맞는 부분들을 선보이는데 시상도 한다. 물론 어느정도는 쇼의 형식정도로 보이는 수준으로 별 신경은 안쓰이지만 시상식 구조를 선호하지 않다보니 마지막에 떠나는 이들에게 공로패정도 주는건 그거려니 하겠는데 (내 돈내고 완전 타인이 상받는걸 왜 봐야 하는지 이해를 못함. 상을 내게 준다해도 입장료를 낸다그러면 안갈듯) 주제마다 시상식과 해설자가 나와서 일일히 호명하는 등 불필요한 일들을 전체 공연시간의 절반가량이나 할애 한다.
이런 구조였다면 나는 6만원이 받는 이 공연을 보진 않았을것이다. 보아하니 관객들도 다들 동종업계에 있는 사람들이 주류인듯 보이기도 한데 동내 잔체에 시간과 돈 내가면서 이래야 하나 싶은 감정이 들기도 했다. 전에 관람 한적있어서 있던 공연들은 중간 토막만 선보여도 맥락을 알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것들은 상황을 알 수 없다. 게다가 창극이니 느낌도 달라서 해당 공연을 보지 않은 경우라면 더욱더 난감할거다. 그래서 갈라쇼같은건 많이 유명해진 넘버들이 주로 나오는게 아니겠나. 그래야 관객들도 함께 즐길수 있으니 내가 이들 공연을 거의 보지 못했기때문에 앞뒤를 상상으로 만들어가며 5분정도 되는 중간토막을 봐야 했다.
연말에 자신들만의 잔치를 왜 비싼돈 주고 보러왔나 싶은 생각이 조금은 들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왜 이런 공연이 6만원이란 적지 않은 돈을 받는걸까?라는 생각도 했다. 차라리 100%초대권으로 관계자들만 초청해서 시상식 하고 관련한 짤막한 관계 공연하는 형식으로 하지. 그리고 유튜브같은곳에서 실시간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면 다 같이 즐기는게 아니겠나.
내년에도 또 같은 공연을 할거라면 시상과 관련된 맨트는 전체 포함해서 10분이내로 끊자. 2시간 공연이라며 1시간을 시상관련으로 영상시청과 해설자 이야기가 차지하는데 이럴바에 공연시간은 1시간 먼저 하고 이후 1시간 시상식(볼 사람만 보는거로) 이런식으로 하던가 그리고 이렇게 길게 시상 할거면 관람료는 받지 말자. 자신들의 잔치에 엄한 사람들 주머니 털지 말고 그냥 초대권으로 알아서들 하던지 하시고 완창판소리 공연같이 이 가격-너무 저렴-에 봐도 되나 싶은 공연도 있지만 이번같은 공연은 돈 아까워 본전생각이 날정도였다.
그런데 '송년음악회'라고 하지 말고 '송년창극회'라고 하면 안됬나? 창극도 음악이긴 하지만 극에 가까운 것을 놓고 왜 '음악회'라고 붙인걸까? 엄연히 설명이 있었음에도 나는 왜 판소리 유명한 대목들, 단가 같은것을 들을거라 기대는 또 왜했을까?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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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는 근래엔 좀 뜸했다. 이유는 아무래도 좀 길고 가사가 한문 그자체인경우가 많아서 어렵기도 하고 몇시간동안 창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좀 안쓰럽고 나도 힘들기도 하다. 그래서 국립극장은 음향이나 무대는 훌륭하지만 의자는 별로기때문에 서너시간 동연을 본다는건 쉽지 않은 선택이다.
오늘 공연은 3시간 공연이었는데 특이한것은 중간에 쉬는 시간이 없다는 것. 3시간 공연인데 쉬는시간이 없다고? 주로 관객은 노인층이 많은데?
판소리 공연 문화가 특별히 쉬는 시간이란게 주어지는 공연은 아니다. 한국의 마당놀이란게 화장실가고 싶으면 그냥 다녀오면 된다. 이런점이 아무래도 서양 공연예술과는 많이 다르긴 하다. 조선시대에 무대라는게 특별히 있던것도 아니었고 실내악도 아닌 고관대작들 혹은 부자들이 초정하면 마당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듣고 즐겼던 문화니 (영화 '서편제'를 보면 소리꾼은 돈있는 양반이 불러오지만 모든 사람이 다 듣도록 열어둔다)
일반적인 무대공연이 익숙한 나로서는 3시간은 그냥 참는 시간이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화장실을 다녀오는거 같다. 물론 한시간마다 해설자가 나와서 해설을 하는데 그때 잠시 다녀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별다르게 시간을 정해두진 않고 이때 다녀오라고 해설시간엔 관객석도 불을 환하게 켜둔게 아닐까싶다.
언제부터 홀로그램 아닌 홀로그램이라며 프로젝터로 돌아가신 분들의 영상을 틀어준다. 40주년이다보니 완창판소리에 출연한 모든 분들을 보여주는듯 싶다. 특이한것은 내가 알고 있는 분들이 제법 있다는 것인데 판소리를 들은게 몇년 안되는데 어떻게 알고 있는것인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알게모르게 TV에 나왔었기때문에 알고 있는것일텐데 조금은 특이한 기분이었다.
공연은 한분당 30분정도씩 총 6분의 명창들께서 나오시고 고수는 두분이 맏으셨는데
김영자 '수궁가' 중 '토끼 배 가르는데 ~ 세상 나오는데' 조소녀 '춘향가' 중 '오리정 이별 대목' 성준숙 '적벽가' 중 '적벽강 불 지르는데 ~ 장승타령' 유영애 '심청가' 중 '추월만정 ~ 황성 올라가는데' 정순임 '흥보가' 중 '제비 강남 가는데 ~ 박 타는 대목' 김일구 '적벽가' 중 '동남풍 비는데 ~ 자룡 활 쏘는데'
이런 레퍼토리였다. 이중엔 정순임 명창께서 올해 여든다섯이란 연세가 믿기지 않을정도로의 열정 그자체를 선보여서 보는 내내 감탄에 마지않았다. 젊은 사람 못지 않은 파워와 오랜 공연에서 익혀진 노련미까지
오늘은 40주년 기념 공연이므로 원로 명창분들만 나오셨기때문에 분위기가 무거우면서도 기분좋은 그리고 멋있고 아름다운 인생의 한장르를 보는거 같아서 소리보다는 예술인들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된거 같아 눈물이 조금씩 조금씩 흘러나오는걸 닦느라 신경좀 쓰였다.
개인적으론 사람들이 은퇴란것을 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힘들어서 쉴 지언정 자신이 평생 해왔던것을 일어서기도 힘들어하는 석양의 끝 자락일지라도 소년, 소녀가 무대에 처음 오르듯 한껏 긴장된 심정으로 공연해주시는 저들처럼 다른 모든이들도 그 끝까지 처음의 설램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던 시간으로
너무 아름다운 공연이었다.
끝에 다같이 모여서 인사해주셨으면 사진이라도 한컷 찍었을텐데 그런 커튼콜이 없다는게 아쉬웠던 진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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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무용을 전혀 이해못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공연을 본다는 것이 맞는지 때로는 의문이 든다. 그럼에도 계속 보려고 노력은 하지만 역시 어렵다. 프로그램을 1층에서 나눠주는데 있는지를 몰라서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는 상태로 보게 되었다. 국립극장 예매 페이지에도 상세한 설명은 없었기때문에 더욱더 모르는 상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만 크게 불안하거나 불편한 기분은 없었다. 무용이란게 무엇인가를 예술로서 형상화하는 것이니 보면 알겠지라는 막연한 오만함과 나태함 그리고 더 이상 무엇인가 할 수도 없었기때문에 편안하게 받아드리자는 심정으로 보기 시작
총 세명의 안무가가 각 한편씩 총 세편으로 구성된것이고 서로 연관성은 없어보인다. 처음은 죽 페스(Festival of Dance & Goodbye)인데 필멸의 존재로서 수많은 철학자, 예술가들이 논한 바로 그 장르 죽음에 관한것이다. 이 작품에서 전재는 사후에 무엇인가 있다는것인지 단순히 망자를 위한 장례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준것인지 무용을 보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사람이 생을 다한다는 것이 축제가 되려면 사후 세계가 있어야 하는데 동서양을 불문하고 모두 있다고 거짓말을 하지만 문제는 누구도 갔다가 온 사람이 없다는것이고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또다른 세계로의 탐험이 낭만적인 서사는 아닐거라는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래서 떠나가는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 사이에서 축제보다는 한국처럼 상여소리 같이 값지게 보내주고 남겨진 자들은 그 시간만큼은 충분히 슬퍼해주는 것이 상황상 가장 적합한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이번 무용은 확실이 이해하기 어려웠고 무엇을 나타내고자 하는지 무용의 무지함으로서 거의 와닿는것은 없었다.(주제 특성상 꺼져가는 한 인간의 희노애락이나 남겨진 자들의 숙명같은 무엇도 크게 느껴지진 않았음)
단지 저들의 무용속에서 힘겨움같은것과 막판엔 정말 축제같은 분위기긴 했는데 나는 이것이 어떤 생명의 탄생과 고난의 과정을 지나 해탈같은 흐름의 순환이 아닌가란 느낌을 받았다. 생명의 순환의 의미로서 축제라고 한다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무용이었다고 보여진다.
두번째는 옷(Beneath the cloth)인데 시작할땐 신선한 물속의 묘사에 놀랐었다. 옷걸이가 낚시 바늘이었는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해초같은 그 풍경은 상상을 너무 자극해서 다시 보고 싶은 장면이다. 그 이후부터는 잘 모르겠다. 수많은 옷들. 그것을 고르고 있는 어떤 존재들. 상호 연계가 되지 않아보이긴 하는데 주제가 단순해서 표현이 더욱더 난해한것일까. 시간이 흐르고 저들은 끊임없이 갈망하고 무엇엔가 쫓기듯 괴로워하기도 하고 웬지 기뻐했던 기억은 나질 않는걸 봐서는 옷이라는것은 나를 가리고 변화하는 용도로서 남에게 나를 감추기 위함이니 그것에 대한 허무함 등을 표현한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것들을 잡아내면 훨씬 좋은 관람이 될 수 있었겠는데 사전 지식이 없이 보는것은 역시 힘들다. 장이 바뀔때마다 한줄정도씩 자막을 넣어주면 안되는 거였을까?
마지막은 너머(Beyond) 인데 가장 난해하고 가장 전위적이었던거 같다. 제목부터가 저 너머에 무엇이 있다는 것인지 수많은 복선들을 내포하는 제목이라서 희망도 있을수 있지만 절망또한 전혀 어색하지 않은 우주같은 제목이다보니 표현또한 이해하기 무척 어려웠다. 이 작품이 오히려 페스티벌 같이 보였는데 훨씬 다채로운 넓은 설정때문에 무엇을 해도 크게 어긋남이 없기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어두운면부터 시작해서 쾌락의 정점까지 올려놔도 되서 곱씹어 생각하면 그 범주내에 있었던 훌륭한 작품같은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것은 내 멋대로 생각한 것일뿐 정소연 안무가의 의도와는 많이 벗어났을것으로 본다. 그리고 기분탓인데 여성으로서의 상징성도 많이 표현된거 같기는 한데 꼭집어 말하기는 어렵고 느낌적 느낌이라고 할지 아무튼 생물학적인 여자로의 묘사가 좀 들어간듯해서 보면서 약간의 벽이랄까? 내가 남자라서 느끼는 어색함이랄까? 뭔가 아무튼 이질적인 기분이 좀 들긴 했다.
이렇게 총 세편이 100분동안 공연되는데 암전 상태가 좀 길어서 긴장감이 깨지는것은 좀 아쉽기도 하고(인터미션은 없음) 각각의 연계성이 없다보니 생각의 틀 혹은 준비상태 역시 리셋되어야 하기때문에 공연이 시작되도 다시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그다지 좋은 구성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 공연을 한국무용이라 하는건지는 모르겠다. 그냥 현대무용이라 하면 안되는건가? 한국 정서가 들어가 있어서 그런것일수 있지만 그것을 골라내는게 여간 힘든게 아니다. 적어도 내가 춤을 엄청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이상 연결점을 자연스럽게 느낀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번 현대무용공연도 내게는 난해함의 연속인 일종의 실패담이지만 뭐 계속 보면 무엇인가 팍! 오는 기분이 들겠지. 안오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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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 춤이란게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이럴려면 다른 나라의 춤들 역시 고려해봐야 할텐데 이쪽으론 워낙 문외한이기때문에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지 난감할때가 많다. 특히 현대무용은 난해하기 이를때없다. 과거로 넘어갈수록 추화상가 덜되었다고 해야 할지 그래서 직관적이라 할수 있지만 한국춤은 처용무같은걸 봐도 도통 모르겠는걸 봐서는 한국춤은 오래전부터 이미 크게 발전되어있던게 아닐까란 생각도 해본다.
한국의 전통 춤 축제라곤 하지만 극장에서 하는 춤 공연인데. 국립극장 앞 넓은 광장도 있으니 이런곳에서 대대적으로 공연 해도 좋을듯한 가을이지만 고정된 공간에서 일방적인 시선을 줄수밖에 없는 극장 공연은 한국춤과는 무엇인가 맞지 않는 기분이 든다.
그 내면은 알 수 없지만 춤에 사용되는 음악은 멜로디보단 리듬이 강하고 한국 리듬악기는 강렬함때문인지 어떤 리액션(추임새)이 필요할거 같은데 의자에 앉아 일방적인 관람형태로는 그게 참 어렵다. 노동요라고 하나? 노동할때 부르는 노래로 민요같은것들인데 이런것도 주거니 받거니하면서 고된일을 좀 잊으며 노동 효율도 올리는 리듬도 곁들이 등 대부분이 이러하다. 심지어 상여소리도 그렇고
이번 축제에 나온것 중 몸이 들썩이지 않는것이라고 하면 첫번째였던 '신태평무'정도 태평무는 아무래도 폼세가 일반사람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장르는 아닌거 같고 나라의 안녕을 위한것이니 궁중무용의 형태여서 관객은 마음편히 보면 된다. 각각의 춤사위는 나름 다 상징하는 바가 있겠으나 이것은 내가 공부를 안해서 아쉽지만 더 깊이 더 감동적으로 볼 순 없었다.
그리고 복개춤은 굿의 형태지만 관람용으로 잘 편집된듯 싶어서 역시 엉덩이가 들썩인다거나 하진 않았다. 기복적인 요소가 있다지만 그 상징성까지는 알아듣기 힘들정도로 한국에서 굿은 많이 사라져가고 있는거 같다.
나머지들이 문제인데 강렬하고 끌어내는듯한 리듬들과 춤사위 관객들은 박수로 리듬을 맞추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할정도의 흡입력을 자랑한다. 그러나 일방적인 이러한 무대의 공연예술로 바뀐 지금의 문화에서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지 관객들의 처지는 난감하다. 한국사람의 흥이 많다고 하는데 이런 문화때문에 흥이 많아진건지 흥이 많아서 이런문화가 만들어진건지 지금은 흥이 사라진건지..(현대 음악 콘서트에서 열광이 남다른걸 봐선 형태만 바뀐거 같음)
전통춤, 전통 무대 예술 분야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난제는 바로 마당놀이로 발전한 이 문화를 어떻게하면 현대적 극장에 맞게 각색할것이냐 또는 모든 극장을 마당놀이 극장처럼 만들것이냐에 달려있다. 아마도 후자는 어려울테니 각색해서 앉은 상태에서 박수정도로 해결하도록 노력하지 않을까? 대중가수들의 콘서트 공연처럼 국악도 모두 뛰면서 놀수 있는 그런 공연은 쉽지 않을거 같다.
이 숙제가 풀리면 한국의 전통공연예술을 르네상스가 찾아올것이고 아니면 희나리처럼 지리하게 이어가다가 사그러들겠지
보통 축제라 하면 굴직한 주제 혹은 슬로건을 놓고 거기서 파생되는 공연을 펼친다. 헌데 이번은 분명 축제라고 걸어놨지만 느낌은 춤 경연대회같이 보인다. 그래서 서로 장르의 연계성이 없다보니 다음 팀 다음 팀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이 좀 나태해진다고 할까? 다음 공연이 기다려진다기보다는 관광지에서 하루 종일 공연하며 관광객들 시선을 끄는 공연같이 보인다. 이런 공연의 특징이나 문제점은 지금 보는 공연이 다음 공연의 궁금증을 발생하지 않는다는것에 있다. 그래서 중간 한개만 보고 극장을 나온다고 해도 전혀 아쉬움이 안생길거 같은 식상한 흐름같은 기분이 든다는것이다. 물론 각각의 공연은 더할나이 없이 훌륭하고 멋지고 아름답다. 하지만 호기심, 궁금증을 자아내기엔 부족하다.
다음부터는 무엇인가 굴직한 주제 한가지를 놓고 각 지역 무용단들이 해당 주제에 맞는 춤들을 가져와서 서로 흐름에 맞게 설정해서 전체 줄거리가 놓고 시작부터 끝까지 어떠한 이야기 한편 보고 나오는 기분을 전해주는 방향의 구성이 되기를 내년엔 기대해보고 싶어진다.
이번 공연에서 특이했던게 천안시립무용단의 덧배기춤이란건데 현대무용과 접목된듯한 화려면서도 처량한 그리고 밝지만 그레이한 춤에서 묘한 희노애락같은게 느껴진다. 동서양 컬레보레이션인지 원래 한국 전통 무용에 이런 묘사들이 있는지 짧은 설명문구만 봐서는 알 수 없지만 무척 신선하기도 했고 낱설기도 했다. 전통이란것이 곰팡내 나는 그대로를 앞으로 계속 그대로 하라는게 아니라 계속해서 바뀌고 바뀌면서 과거와 현대 그리고 미래까지 이어져 가는것이니 저들의 도전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보인다.
이틀간 공연하고 겹치는 공연이 없기때문에 4시간 축제 공연이라 해도 되지만 아쉽게도 두번째날 것은 티켓을 구매 못해서 볼순 없었다. 하루에 모두 해달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한 이주 정도 나눠서 두번정도 공연하면 안됬던건지 아쉬움이 생긴다. 회사를 다니는 입장에서 거리도 있고 끝나면 피곤함도 있어서 티켓이 있더라도 이틀 연속 보기에도 쉽지 않기때문에 한주에 한편씩 볼 수 있고 같은 공연을 두번 이상 하면 좀더 많은 사람들이 관람할 수 있으니 전통춤의 저변을 확대하는데도 좋아보이지만 어찌된일인지 전통 공연은 하루 딱 한번씩만을 할 뿐이다. 어떤 정책이 있는건지 이유는 알 수 없다. 국립국악원에서도 그렇고 국립극장에서도 그렇고 다른 대형 극장들도 그러하다. 반면 서양 고전은 웬만해서 한번에 끝나진 않는다. (연주 리사이틀 같은 경우 혼자 하기때문에 단 1회 공연이 많긴 함)
이런 훌륭한 공연이 단돈 만원이니 티켓 구하기가 얼마나 어렵겠는가? 이마저도 할인 혜택이 들어가면 몇천원 수준이고 여기에 자동차까지 있으면 주차료 5천원을 할인해주는데 이러면 무료나 다름없다. 너무 많은 횟수를 하는건 무용가들도 힘들테니 장르 특성상 두번정도라도 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좋은 공연을 좋은 극장에서 안락하고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좀더 주길 기대해본다. (1회 공연으로 끝나는건 기획자나 무용가 입장에서도 너무 아쉽지 않나?)
출연 : 국립무용단, 남도국악원, 경기도무용단, 대전시립무용단, 천안시립무용단, 인천시립무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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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맨 앞자리 티켓을 샀다니.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앞자리를 샀겠지만 무대가 너무 높아서 오케는 앞 두어줄밖엔 안보인다. 하지만 연주자들의 생생한 연주소리를 들을수 있는것은 엄청난 잇점이긴 한데 목이 약간 아프고 북소리는 아무래도 소리가 크다보니 귀에 조금은 쌔게 온다. 아무튼 맨 앞자리는 어쩔수 없는경우 아니면 구매하지 마시길.. 목아픔 (연극같으면 앞자리라도 크게 문제될거 같지 않음)
국악기로 관현악단이 있을수 있을까? 관악기를 보면 태평소, 피리, 단소, 생소중대금류, 그 외 길쭉한 나발, 소라같은것도 있고 현악기는 해금(깽깽이), 가야금, 아쟁, 거문고 타악기는 북, 꽹가리(이건 관현악기로 넣기엔 좀 무리가 있으려나), 징, 장구 같은거
분명히 한국 전통 악기의 종류도 서양 악기 만큼이나 다양하고 각각의 독특한 음색들이 있다.
그래서 산조(일반적인 독주로 봐야 하는지 궁중음악을 빼면 모두 산조로 보면 될려나)는 좋은데 합쳐지면 뭐랄까... 서양악기들의 조화와는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국악기들의 음색은 거칠어서일수도 있는데 악기에 노이즈가 너무 섞여있다고 하면 맞을런지 바람소리가 많다고 해야 할지 현악기들도 현들의 투박하고 거친 소리는 해금마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양악기들은 이런부분에서 체계가 잡혀서인지 음색이 엄청 정갈하고 맑은편이다.
이번 국악악단에도 북은 팀파니가 있는데(더블베이스도 있는거 같음) 그 소리는 역시나 엄청 튄다. 개인적으로 팀파니의 소리는 북소리중엔 단연 으뜸이라 생각하는 입장에서 국악기의 거친 소리들과는 합쳐지기 쉽지 않게 느껴졌다.
소리가 명학하게 나뉘는 서양악기라고 해서 좋다는 의미는 아니고 단지 음색이 그러하니 연주형태나 청감에서도 느낌 차이가 크다는 것인데 거칠고 투박한 음색은 역시나 내면으로 침투하기엔 좋으나 이건 솔로일때 그런것이고 합쳐지면 비수같은 날카로움을 살려내기란 쉽지 않아보인다.
한국 고유 악기로 악단을 꾸려가는 단장의 최대 고민거리겠지만 오늘은 과거의 그 모래먼지같은 느낌은 확실이 줄어든 신기한 경험이었다.
아직까지 악단은 어떤 배경 효과음같은 조성이 많기는 한데 이런부분도 훨씬 극적이고 가야금, 피리 산조에서 서로 주고 받거나 받쳐주고 띄워주는 역할이 대단히 좋아서 웅장하면서도 감동적인 서양오케에서 맞보는 짜릿함을 국악단에서도 제법 감동적으로 느낄수 있었다.
가야금산조 협주에서 가야금이 그다지 극적인 악기는 아닌지라(악기때문인지 연주법때문인지는 모름) 감정을 끌어올려놓은 악단의 기조를 고스란히 받아내기엔 쉽지 않았지만 분위기를 바꿔놓는데는 충분한 협주자로서의 역할이 훌륭했다. 가야금이란게 쫘~악 뻗는 음색이 아니라서 웅장함의 바텀을 받아내기란 쉽지 않았을텐데 수십년간 닦아온 연주실력으로 만족스럽게 이끌어가는 모습은 산조를 들으며 울컥하게 만드는 드믄 경험이었다.
피리연주의 여유로운 솜씨(평생을 공부한 전문가들의 여유랄까?)는 표정에서 부터 즐기는것이 느껴질정도다. 무대를 즐기며 연주하는 모습은 전쟁터 가장 앞에서 말을 타고 전진하는 장수같은 풍모와 기개였다.
국악기 특유의 거칠고 투박한 놈을 노력으로 다져진 실력으로 모든것을 커버치는 진정한 명인들. 아마도 오늘의 모든 연주자들과 지휘자가 그러하지 않았나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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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녁 7시30분 공연인데 중간 쉬는 시간 포함해서 170분? 가끔은 이렇게 한밤중 공연 한편 기분좋게 보고 집에 오는것도 좋긴 한데 집까지 또 한시간을 가야하니 쉽지 않다. 올해는 앞으로도 적지 않은 편수를 평일공연으로 예매해놨으니 조금은 한숨이 나온다.
흔한 심청을 생각하고 왔다가 큰코다칠수도 있을수 있지만 전체적으론 그렇지 않다. 일단 한 90%는 심청전 줄거리를 거의 그대로 따른다. 1인 판소리 장르를 떼창으로 하니 다들 끝까지 좋은 목 상태를 유지해서 안쓰러움도 없고(한명이 하는 판소리 완창은 언제나 힘들어 보임)
현대적인 의상, 현대적인 배경으로 바껴있다. 현대물로 완전히 바꿔놓은것인가? 고전 '로미오와 줄리엣'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현대 버전같이?
인당수에 빠지는 부분까지만 봤을때는 옷만 현대적이지 그냥 고전물인가 싶었는데 끝은 그것과 거리가 멀어보이고 이해하기도 쉽지는 않았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들이 눈을 뜬다?까지는 내용 흐름상 장르가 판타지니 그러려니 하는데 이번 각색된것은 저 소녀의 정체는 무엇인가? 심봉사는? 환경은 조폭에게 당하는 일가족을 말하는거 같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무엇을 상징하는지 이해안되는 부분이 많다. 파격적이네 뭐네 하긴 하는데 기존 극에서 잔인성을 부각하게되면 웬만해선 파격적이 된다. 이 창극 역시 노랫가락으로 부드럽게 넘기는 부분을 좀더 현실감 있게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져들때 다리를 묶고 무거운 물체에 매달았다거나 하는건 아무리 심청이의 심정이 굳건하더라도 죽음앞에선 쉽지않기때문에 잔인한 현실의 실감나는 설정이다.
전제적으로 다른 공연에서는 접하기 쉽지 않은 기괴하면서 아방가르드(전위적)한 창연극인데 이런류의 특징이 너무 작가주의적이라서 이해해야 하는 관객입장을 잘 고려되지 않는다는것이 심각한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그래서 한국사람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알고 있는 심청전을 보면서 ???????? 라는 물음표가 나오게 하는것이겠지
좀 그렇고 그런 내용을 무대장치와 음악 그리고 창으로 떼우고 있는거 같다.
처음보는 광경으로 카메라맨 한명이 라이브로 계속 무대를 왔다갔다하면서 찍는다 그것을 무대 윗쪽에 실시간으로 적절하게 화면으로 뿌려지는데 개인적으로 저장영상을 무대에 플레이하는걸 싫어하지만 이번은 획기적이라 해야 할지 단순히 막 찍는걸 그냥 보여주는게 아니라 잘 짜여진 동선 그대로 연출이 원하는 그림을 그대로 만들어가는듯, 관객은 영상이나 무대의 배우들이 하나된 공연을 보는듯 거슬림 없는 훌륭한 무대를 만드는걸 보면서 감탄을 안할 수 없었다. 특히 흑백으로 표현되는 영상은 그 특유의 자극적으로 부각되는 표현은 일반 무대의 배우들에게 볼 수 없는 모습으로 인물의 이중적 모습을 실시간으로 감상할할수 있다. 다만 카메라맨이 기계를 주렁주렁 매달고 왔다 갔다 하니 시선을 빼앗기는거 같아서 좀 그렇지만 아무튼 오랜만에 느끼는 신선하고 창의적 연출을 본거 같은 뿌뜻함? 기분좋음? 대충 그런느낌이긴 한데
심청전 배경엔 분명 인신공양이 있었던 무지한 세계였을것이다. 왕과 함께 죽는 순장도 조선이전에 있었을정도였으니 인류 역사 한 1~2백년만 앞서가면 얼마나 미개한 생태계였는지 단번에 알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 인신공양은 대부분 여자아이, 갓난아기등을 했다는 것이다. (여아를 주로 했던것은 아무래도 전쟁으로 남자수가 부족하고 성인여자는 출산과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니 그런것이 아닌가생각됨)
아무리 그렇다고 지금 시대의 여자 아이들이 떼로 웃으면서 나오고(거의 백명은 되보임) 나중에 심청이가 죽고 다시 살아났을때도 떼로 서있는 장면은 뭔가 섬뜩하다. 특히 초입부분에 아이들이 막 웃을땐 공포심마져 들던데 일부 중년 여성들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귀엽다고 좋아하지만 나는 왜 공포심으로 다가왔을까? 인위적 웃음소리를 떼로 들어서 그런것인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웃어서 그런가? 물론 나는 저 웃음을 공감못한다. 심청이의 추정나이는 15세정도로 중학생정도인데 저 아이들은 누가봐도 초등생들이니 심청이 나이 15세면 그 시기 기준으로 결혼할 수 있는 나이로 예전 환경으론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시기라서 아이로 보기엔 무리가 있는데 저 기괴한 아이들의 설정은 무엇일까? 작가가 당시의 나이와 지금의 나이를 착각하는것인가? 꼬맹이 철부지 아이의 심청이를 생각하는것인가?
그리고 현대의상까지는 그러려니 하는데 심청이의 어머니(곽씨)가 돌아가셨을때 마피아, 조폭같은 의상은 뭐지? 심학규가 엄청 잘 사는 조폭인가?싶었다. 그런데 조폭같은 사람들은 심학규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냥 상가집에 온 사람들인데 한국사회에서 상가집에 방문한 사람들의 태도가 저렇다고? 어디서 조폭영화만 잔뜩 보고 온것일까? 이 연극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심청전이 무슨 전쟁, 스릴러, 폭력물인줄 착각하지 않을까?
그리고 심학규가 심청이 젖동냥할때 정말 무서웠다. 검은색 상복을 입은 여자들이 저고리 한쪽을 모두 풀어해치고 무표정하게 서있다. 그것도 수십명이.. 마치 자신은 젖동냥하는 마네킹인냥.. 그래서 더욱더 심봉사가 조폭 두목이고 저 여자들은 어떠한 환경으로 억지 젖동냥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인식했다. 물론 그것과는 관계없는 나만의 오산같다. 이런 전위적이며 추상적인 장르의 특징인 작가가 꼴리는대로 설명하니 좀 거북스럽고 이해가 안되는것은 필수인가. 이런것을 파격이라 하면.. 심청이가 심봉사를 이용해 돈벌고 장기 팔고 흥청망청 사는 내용으로 바꿔놔도 파격이라 포장하겠지.
현대적 해석은 일단 고전의 내용을 충실히 하면서 현대인들의 시각을 가미해서 재해석해야 하는데 이렇게 비꼬아놓고 해석을 달리했다는건 납득하기 쉽지 않다. 이 작가 작품중 '점찌고 옹녀'를 봐도 여성주의적(페미니즘) 시각으로 좀 이상하게 꼬아놔서 비주얼은 좋아도 막상 내용은 별로였는데 이 작가의 특징인지..(작가마다 뷰에 몰빵하고 내용은 겉치레에 불과한 사람도 있고 반대인 사람도 있고)
아무튼 이상한 오해를 받을수 있는 충분함이 있다.
그리고 장승상댁 부인은 무슨 매춘부 알선하는 사람처럼 묘사하는건 왜일까. 조폭 느아르를 만들고 싶었던거인지도 모르겠다. 선인을 악인으로 바꿔놓는것이 현시대의 시선이란소린지 아마도 이부분은 심청이가 막판에 만신창이가 되니 그 일환으로 장승상댁도 그런 주변인물로 바꿔놓은것일수 있긴 하지만 이럴바엔 '심청'이란 제목을 쓰지 말던가. 이게 이렇게 되면 심청전 원전대로 만들어지는 공연을 볼때 색안경이 씌어지지 않겠나. 선악이 갈리는 장르는 아니지만 묘사된 인물의 성품에 색이 있다면 그 성향은 바꿔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전 조폭을 미화하는 영화가 문제 됬던것은 수많은 사람 중 소수가 미화된 혹은 악화된 것을 그대로 받아드려 사회 문제가 될수 있기때문 아니었나)
그리고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보이도록 만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공양미 300석을 시주하면 눈을 뜰수 있다고 얘기했던 화주승을 거의 악의 화신처럼 그려놓고 있다. 공양미 이야기 자체가 가스라이팅해서 자신의 딸을 사창가(장기 매매인가?) 같은곳에 팔라고 강요하는듯한 나쁜놈의 우두머리처럼 그리고 표현한다. 이름이 요나김(김요나라고 한국 이름표기법대로 사용하는것도 아니고 외국 방식대로 했다는것은 자신은 한국인이 아니라는것을 표현한것일텐데 한국사람 껍떼기를 한 외국인인가? 글로벌시대에 이런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국사람인척 하면서 뒷구멍으로 한국 욕하고 자신의 이익추구만을 일삼는 매국노들이 문제지)이던데 종교적 색채가 묻어나오는건 나의 선입견때문일거 같다. (찾아보면 요나는 남자 세레명이라 하던데 이분은 여성 아닌가?)
전체 배경이 조선시대 어떤 효를 강요하듯 꾸며낸듯한 이런 내용이 아닌 거친 배경에서 생존을 위해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세상에 악마화 된 종교인이 없을리는 없겠지만 심청전에서 화주승이 갖는 의미는 종교에 대한 어떤 망상같은 성찰과 거짓 능력 등이 부각되는 주된 장면으로서 서유기에서 멍청해보이는 삼장법사가 지니고 있는 종교적 상징성과 비슷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인물인데 시정잡배, 사기꾼따위로 만들어 놨다는것은 기독교의 에반겔리즘(복음주의)으로 비롯된 배타주의의 파생이 아닐까? '너네가 믿는 저 종교의 뒷모습은 이렇게 추악한 사탄과 같은 존재다~'라는것을 우회하여 비꼬듯
화주승때문에 심청이는 인당수에서 죽게 되는데 문제는 이로인해 다시 살아나고 황후(조선시대에 황후가 있나?)가 된다는 온갖 설화를 막 가져온듯한 이상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전체 뼈대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고? 그것도 사상적 뼈대가 되는 불교와 도교의 자비롭고 신비로웠던 세계를 개깡패같은 놈으로?
작금의 한국은 이상한 미신에 휘둘려 나라가 개판일보직전까지 몰렸다가 한국 민중들께서 합심해서 간신히 위기를 되돌려놓은 상황이니 종교의 폐해를 모르는바 아니지만 그렇다면 고전을 현대물로 재해석하는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신작을 만들어야지 멀쩡히 있는 과거로부터 사랑받아왔던 한국인 정서에 잘 부합하는(아비가 딸을 파는것 말고) 내용을 가지고 와서 썩어버린 사회에서 치유되지 못하게 만들어놓는것은 어떤 저의가 있는지 솔직히 의심스럽다.
이 공연을 본 사람은 앞으로 심청전을 효녀심청이로 볼 수 있을까? 영화 '아마데우스' 때문에 살리에르를 천하에 못된놈으로 바꿔버렸는데(아무리 영화적 허용이라해도 이러면 안되는거 아닌가?)
효자,효녀란게 과거에 허벅지 살을 도려내어 부모님을 공양했다는 것이 지금 통용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판소리 심청가는 전체적으로 보면 좀 해학스럽다. 심청이 어머니는 가부장적인 남편을 극진히 모시고 심청을 낳았지만 딸이라서 좀 서운해 하기도 하고 (심학규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심학규가 봉사기때문에 부귀영화도 힘든 상황)
심청이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대목은 무척 슬프다만 이 후부터는 심학규와 심청이의 부녀지간 사이도 적당한 그냥 형편 어려운 가정이었다. 딸자식을 어떤 꾀임에 빠져 300석에 팔았다손 치더라도 황당한건 생각보다 심학규의 삶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는것 뺑덕어멈과 동거를 할때도 딸 팔아 공양 후 남은 돈으로 적당히 잘 먹고 잘 살다가 돈이 거의 떨어질 무렵에 심청이는 인당수에 빠져 죽다가 살아나 용궁에서 엄마도 보고 착하게 살았다고 황후가 되서 맹인잔치를 열고 각 고을에선 돈을 줘가며 잔치에 보내니 심학규 입장에는 땡큐 아닌가?
제일 특이한건 심학규는 맹인잔치에 가면서 뺑덕어멈을 잃었지만 홀로가면서 여인네들 일좀 도와주며 밥,고기 등 얻어먹고 옷을 홀라당 잃어버렸음에도 기지를 발휘해 옷, 노잣돈, 담배(당시엔 비쌌다고 함)도 얻는등 웃기게도 좀 황당한 호사를 누린다. 게다가 안씨를 만나서 결과적으론 재혼까지 하게 되는데 안씨는 부자기도 하다. 아마도 심청전에서 승자는 심학규가 아닐까싶을정도
심청전의 특징은 웬만해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행복하게 끝난다는 것. 심청가, 춘향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 이런 한국 공연문화를 보면 한놈만 완벽하게 나쁜놈을 만드는 경향을 보긴 쉽지 않다. 그래서 결국 다같이 조화롭게 잘 살아간다는 황당한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특정 종교적 시선이 가미되면 선악이 확실하게 구분되면서 중간에 선을 딱! 그어놓으려 애쓴다. 이번 '심청' 창극을 꼭 그렇게 볼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3시간 남짓되는 동안 해학은 어디에도 없고 우울하고 암울하며 더럽고 추악하다. 영화 '베트맨'의 고담시티나 영화 '씬시티'같이 디스토피아도 아니고 유토피아도 아닌 못된짓을 하면 적당히 밥은 먹고 살거 같은 세상이랄까?
왜곡된 섹스어필, 이런 배경이라면 당연히 필요하겠지. 괴기스러운 여자들, 북에 피는 왜 발라놓은것일까? 이럴때 피는 여자의 그것을 상징하긴 하는데 그것이 맞을까?
오늘 콘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였지만 퇴근 후 3시간동안 졸음따위는 개나 줘버린 몰입력 끝장나는 창극이었으나 무엇인가 가슴한편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남아있다는것은 전위예술의 특징이려나.. 신선함은 최고인데 무엇이 불편하게 만드는걸까.. 재미있는지 없는지 가늠하기엔 어려우니 두어번은 더 봐봐야 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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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더운 날이라서 국립극장까지 버스 갈아타며 갈만큼 괜찮은 연극이길 기대했었다. 웬만하면 연극볼때 큰 기대를 하지 않지만 그래도 가는길이 고단하니 코딱지 만큼 기대했다. 무대에 많이 서있는 나무들. 한겨울이 배경이라서 그랬을까. 극장 내부도 약간은 선선(추울정도는 아님)
연극이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배우 한둘이 무대를 가로질러 횡단한다. 지나가는 행인1,2 같은.. 마을 분위기와는 다르게 평온한 걸음들..(마을의 사건들을 생각하면 다급하거나 조급해야 할거 같았는데)
그리고 시작하자마자 한 남자를 기절시킨후 거꾸로 매달아 목을 딴다. 매우 잔인할수 있지만 무대가 너무 어둡워서 앞에서 5번째 줄임에도 배우들이 엄청 멀게 느껴져서 잔인하지도 않고 피가 피같아보이지도 않았지만 상황은 무서웠다. 연극에서 사람을 거꾸로 매달고 칼로 목을 그어 피를 받다니. 동물 잡아서 피 뽑아먹듯
어두컴컴한 곳에서 사람을 도륙하는 장면을 연극에서 본다는것은 약간은 충격이었지만 배우들의 세밀한 부분들이 전혀 보이질 않아서 감흥이 별로였다.
난해한 배우들의 움직임들. 이게 뭐하는 짓들일까? 무엇을 상징하는거 같지만 전체 내용은 별볼일 없기때문에 이러한 행위들은 없는것을 있어보이게 하려고 하는 수작질(단순한 플롯을 좀더 복잡하고 난해하게 보이려는 개수작)로 밖엔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학원폭력. 서양에도 학원폭력이 심한것일까? 남자주인공 오스카의 배경으론 집단괴롭힘을 당하는 고등학생? 학교선생은 여학생들 옷 갈아입는것을 훔쳐보느라 오스카가 폭행당하던 말던 신경 안쓴다는 대화가 나오는걸 봐서는 이 나라의 교육현실이 개판이거나 과장되었겠지만 대부분 이런건 현실을 반영할거란 생각이다. 그래서 위키에서 원작을 찾아보니 1980년대 무렵 스톡홀름 노동자들의 현실을 충분히 반영한 것으로 불안, 고립, 학원폭력, 소아성애, 살인..등 수많은 사회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와 같은 배경지식이 없다면 일단 이 연극을 이해하는것은 물건너간것이다. 한국인이 이해되도록 각색을 해야하는데 연출이 외국인이라 그런가? 지가 알고 있는 배경을 한국인도 알고 있겠지 싶었나보다. 원작 그대로 영화에서 가능한 표현을 제대로 표현도 안되면서 연극에서 마구잡이로 써대고 있다. (보다보면 연극치고는 멋지지만 영화를 생각하면 허접하기 그지 없다. 이런 오컬트같은 호러 멜로를 연극에서 표현한다는게 맞는 것인지 난 늘 궁금하다. 그리고 제대로 표현된것을 본 기억이 없다.)
난대없는 흡혈귀라니.. 이와 비슷한 내용을 만환지 영환지 어디선가 본거 같긴 한데 아무튼 흡혈귀여자 엘리를 위해 피를 구해주며 사랑하는 상대자 이 극을 모티브로 만든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작품은 당시의 노동자들과 학생들 그리고 사회를 표현하고 있는거 같다. 하지만 한국에서 전혀 먹히지 않는 방법으로 풀어내려고 한다.
그지같은 흡혈귀. 현실을 도피하는 용도로 서양에서는 흡혈귀를 종종 이용한다. 불노불사, 귀족, 부자.. 등 서민들이 꿈꾸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기때문이고 흡혈귀가 피를 나눠주면 그 사람도 흡혈귀가 되어 불노불사 되니 서양인들에겐 매력있는 도피수단으로 보이는거 같다. 반면 한국에서 이와같이 귀신같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것이 있을까? 기껏 있어봐야 도사? 도사는 오래살긴 하지만 총맞아도 죽고 칼맞아도 죽는 그냥 가만히 있을때만 영생하는 존재정도로 일도 해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한다. 생각보다 큰 능력을 지니고 있어보이지도 않는 인간적인 존재인 반면 드라큐라(흡혈귀)는 좀 다른 존재로 모든 능력이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다. 심지어 괴롭지만 아무것도 안먹고도 영생한다.(못 먹어 피골이 상접하여 고통스러워하긴 해도 죽진 않음)
이런 존재를 이용하여 고통받는 한 생명을 구원하는 구성은 흔하디 흔하기때문에 이럴경우에는 그 배경을 보거나 관객을 이해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 연극은 전혀 이해시키지 못한다. 물론 한국에서도 집단괴롭힘이 사회문제였기때문에(지금도 문제는 계속될것으로 보임) 오스카가 겪는 수많은 고통을 모를수는 없지만 배경에서 무언가 한국사회하곤 맞지 않는다.
이것은 연출이 한국사회를 전혀고려하지 않은 처사로 책 번역을 사전적 의미로만 번역을 해버린것과같이 어색하게 다가오고 저들이 겪고 있는 아픔은 어떤 벽에 가로막혀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정작 읽혀야 할 그 무엇은 오간데 없고 재미없는 흡혈귀 맬로 한편 본것으로 밖엔 안느껴진다.
특히 막바지 흡혈귀(일라이)가 인간(괴롭히는 나쁜 사람들)을 학살하는 장면은 뭐랄까? 여자는 허공에서 허부적거리고 있는데 멀쩡한 남자들 셋이 그냥 '아~'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빙신같은 장면은 지금도 황당하기 그지 없다. 연출은 왜 이런 어이없는 장면을 생각한것일까? 드라마나 영화로 평이 좋았다고 하는데 이런 부분에서 잔혹함 그 자체를 제대로 표현했을테니 어색함 없는 잔인함을 보였겠지만 연극에서 그것이 표현하기도 어려울테고 이것만 가지고 이 연극 전체를 이해할수도 없기때문에 꽤나 재미를 찾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다만 학원폭력에서 욕은 제대로 참 많이 나온다. 도입부에 사람을 거꾸로 매달고 목을 긋는 그것과 같이 학폭도 그런식으로 잔인하게 묘사됬더라면 어땠을까.. 엄한곳에서 피를 떡칠하지말고(피는 엄청 효과적으로 잘 쓴거 같음) 이런 현실 묘사에서도 좀 신경 썼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쉽다.
그리고 마지막에 모르스부호로 뭐라 보내니 엘리도 뭐라 답장한다. 무슨 내용인가 찾아보니 '키스'라는 문자를 모르스부호로 보낸것이라고 나온다.(연극 말고 인터넷으로 찾은 내용) 자막이라도 올리던가.. 감독이 한국사람은 모두 모르스부호를 알것이라 생각한것일까? 아니면 그냥 모르면 모르는대로 넘어가라. 라며 무시한건가? 아니면 또라이인가? 참.. 그지같은 결론이었다. 당시 그 부호가 키스 란것을 알았다면 조금이라도 애뜻함이 바닥에 깔리는 맛이 있었을텐데.
전체적으로 배우들의 디테일함이 대단히 모잘라서 아니 전혀 안보여서 아니 전혀 표현되지 않아서 연극 자체가 밍밍하고 배경지식이 있더라도 무엇인가 흡혈귀따위로 현실도피하는 것은 한국인 정서에 맞아보이지도 않는다. 각종 무대장치들을 보면 돈 아깝지 않다고 느낄수도 있지만 연극이란게 영화와 다르게 좀더 인간 내면을 파고드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꽤나 엉성한 연극이었다.(내용상 영화나 드라마는 완전히 다른 감동이 올거 같음) 이런걸 왜 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국립극장에서 하는건지.. 가격도 10만원씩이나 하는 재미없는 연극을.. 국립이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상대적으로 좀 저렴한 금액대의 공연을 해줘야 하는거 아닌가? 내 욕심인가?
언제부턴가 세금으로 건설되고 운영되는 국공립시설들이 돈벌이에 혈안이 된거 같아 안타깝다. 특히 '예술의 전당'은 '돈의 전당'같아서 개같은 기분을 느낀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아무튼 이 돈 주고 보라곤 차마 말 못하겠다. 차라리 드라마 '트와일라잇'이 영화 '뱀파이어와 인터뷰'를 치맥과 보는게 백만배는 재미있을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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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치백(hunchback)이 무슨 의미인가 싶었더니 곱추(등이 굽은 사람)라는 의미라 한다. 그러면 제목 옆이라거나 팜플랫같은 곳에 좀 적어놓으면 제목만으로 10% 이상은 이해됬을텐데
신기하다 프로그램 종이에 맹인용 점자가 함께 박혀있다. 내가 노안이라 그런지 이 점자때문에 극도로 읽기가 힘들었다. 누구를 위한 점자였을까.. 맹인용 점자라면 이런 프로그램 위에 점자를 박지 말고 별도 종이에 점자를 받으면 안되는 거였을까.. 분명히 이렇게 하고 잘했다며 스스로 우쭐했을거 같은데
일본 작품들을 보면 한국보단 성적 묘사나 심리 묘사가 훨씬 자유롭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책 내용에 아이를 임신해서 중절수술 하고 싶다고 당당히 적혀있다면 장애자는 커녕 장애자할아버지라도 온갖 지랄들이 판쳤을거다. 특히 일부 종교계에서 더욱더 지랄발광을 했겠지..
하지만 일본것이라 그런지 조용하다. 일본은 원래 이런 애들이라 조용한게 아니라.. 우리보다 힘이 쌜거 같아서 조용히 있는게지..
마침 요즘 고마광수 교수 책을 읽고 있는데 성에 대해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큰 억압을 해대고 있는지 꼬집는 부분이 많이 나오는데 이 연극을 보니 일본 특유의 성적 관대함(실제로 그런지 모르겠음)은 한편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현의 자유에서 실제로 몸이 불편한 이치카와 사오의 작품으로 자신의 현실을 적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직접 처한 현실과 멀진 않을것이란 생각과 직면한 현실에 대한 긒은 고뇌를 드러낸다.
그런데 이 연극은 한 사람의 독백을 여러사람이 나눠서 이야기 하고 설명하고 키가 좀 작은 왜소증인 분도 나오고. 이렇게 여러사람이 한사람의 심정을 대변하다보니 생각보다 집중도가 대단히 떨어진다. 차라리 모노드라마로 등장인물을 모두 한 배우가 상황 설명으로 하는게 더 극적이지 않았을까? 좀더 절망스럽거나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란 생각이 든다.
달오름 극장이 큰 극장이긴 하지만 또 그렇게 엄청난 크기도 아닌데 배우와 이상스럽게 멀게느껴지는 구성도 공감대를 해치는 요소로 작용하는데 왜 멀게 느껴졌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무대가 산만하고 어지러운 딴 세상 같았다. 다나카준(?)이라는 요양보호사(?)같은 남성은 샤카를 놓고 왜 비아냥 거렸을까? 단순히 장애자를 비하하는거 같진 않고 샤카가 그동안 자신의 심정들을 올려놨던 SNS를 보며 생겨난 감정같은데 연극보단 아무래도 책을 보는게 좀더 구체적으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듯 하지만 아무튼 이 사람의 행동은 별로 이해되지도 않고 이유도 모르겠다.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은 몸에 생긴 장애로 인한 열등함은 생존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고 전쟁을 오랫동안 한 일본에선 우생을 우대하겠다는 신기한 발상도 나올법하긴 한데 이런부분은 무언인가 옛 한국과는 크게 맞지 않는 정서같다. 지금 한국의 일부에서는 우열을 철저하게 나누려는 병신같은 시도도 있기때문에 저들의 저런 황당한 정책을 미개하다고 치부하기도 어려운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성소수자들을 이유없이 비난하는 자들이나 몸이 불편한 사람을 멸시하는 것이나..
다만 성소수자들은 감추면 완벽에 가깝게 타인이 모르도록 할 수 있지만 지체장애자들은 그것이 안되기때문에 사람들의 잘못된 시선은 비수가 될수 있고 행동을 왜곡시킬수 있다.
작가는 이걸 말하고 싶었을까? 고급 창부가 되고 싶고 아이를 임신해서 중절 수술을 하고 싶다는 뭔가 한국적이지 않은 발상을 하는 저 일본인은 일본사회에서 대수롭지 않은지 모르는 저런 일들이 저 사람에겐 간절하고 사무치는 염원이었을까..
인간의 상상력이 성적 묘사로 꼿히기 시작하면 그 끝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그 한계를 보여주진 못한다. 연극도 그렇고 읽진 않았지만 책도 그럴것이다. 이들에게 현자타임(절정 이후 평온하고 무기력하며 안정된 상태?)은 어느 꼭지점을 찍어야 가능한지 모르지만 요즘들어선 내 뇌의 농락에 내가 놀아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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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번주 추위가 이번 겨울의 마지막 추위일것으로 예상된다. 왜냐하면 다음주가 입춘이니 늦추위라고 해봐야 거기서 거기겠지 폭설주의보니 뭐니 잔뜩 겁만 주더니 서울은 그다지 많이 내린거 같지도 않다. 연극이 끝난 후 남산을 올라갔지만 역시나 많이 쌓인 곳은 없었다. 이번 겨울은 이사하기 며칠전에 내린 것 빼곤 항상 우산을 써야 할정도 외엔 없던거 같은데 이렇게 끝나려나..
붉은 낙엽은 붉다의 의미와 가을이 갖는 두가지 각각의 상징을 뜻하는걸까.. 희망이 없는 가을.(겨울은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봄이라는 설램)
뭔가 불필요할정도로 많은 나래이션이 거슬린다. 너무 많은 설명구들 없어선 안될 것들을 넣은것이겠지만 소설을 희곡으로 바꾸다보니 생겨난 현상인지 아무튼 시작부터 장구한 나래이션때문에 신경쓰인다.
가족관계를 인식하는 당사들의 오만함을 이야기 하는것일까? 왜 가족들간엔 거짓이 있어서는 안된다고들 생각하는걸까? 특히 부모 자식간엔 더욱더 강요당한다. 어차피 무시,괄시하는 그 최전선에 있는것이 가족 아니었나? 그러니 예수도 고향을 가기 싫어했겠지
이런 환상속 갇혀살아가는 가족간의 근원적인 불신의 벽을 이야기 하는거 같다. 아무리 혈연관계라 할지라도 일단 금이 생겨 벌어지기 시작하면 타인보다 더 무서워질수 있다는 것을 강렬하며 집요하게 파헤친다. 고통받는 쪽은 대부분 힘없는 부류. 소외계층, 선입견의 대상, 힘없는 자, 사회적 보호 제외대상자들 등
이러한 갈등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땐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을땐 무엇보다도 잔인하게 표출되는데 첫 대상으로 형인 워렌과 아버지인 빅터에게 화살이 쏘아진다. 색안경의 주된 요인은 과거에 대한 자신만의 기억들. 하지만 정확한 정보가 들어있지 않아보인다. 단지 스스로의 추정만으로 모두에게 칼을 꼿는다. 때론 스스로에게도 꼿는 어리석음을 보이지만 이것은 가족관계 특유의 오만함으로 '너는 모르는게 낫다'라는 특이한 논리로 한사람을 평생 바보로 만드는 단편을 보여준다. 그럴거면 죽을때까지 입밖으로 꺼내지 말던가. 몇마디 말에 욱!해서 모두 털어놓는걸 보면 인간의 나약함인지 관계의 빈약함인지.
아직 미성숙된 자식에게도 여지없다. 답을 정해놓고 취조하듯 물어보는 부모의 태도를 보고 진실을 말한다고 진실로 받아드려질까싶다만 그럼에도 자신의 진정성을 받아주기 바라는 지미(자식)의 심정은 벽에다 자신을 변호함과 별반 다름없는 답답함을 보여준다.
이 연극에서는 엄마는 오히려 큰 비중이 있는것은 아니다. 어떤 일부 사건의 소재로서만 활용될뿐이고 에릭(아버지)의 현상을 위한 소재로만 활용되기때문에 다른 역할로 대처되도 극의 흐름에 큰 문제가 될거같아보이진 않는다.
실종아이의 엄마인 카렌도 극 전체에서 의미가 커보이지 않는다. 오죽하면 실종아이를 찾았음에도 대충 몇마디로 모두 끝내버리고 수십년 후 다 큰 성인이 되어 에릭을 찾아오는거로 마무리 될정도다.
에릭의 나래이션(독백아님)으로 시작해서 에릭으로 끝나는 연극으로 한 인물의 부족한 정보, 왜곡된 기억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파멸시킨 인물에 대한 내용이지만 전체적으로 흐름은 진부하다. 일단 전개가 그다지 신선하지 않다. 이 소설이 나온지 오래된것도 아니니 지면으로 보면 좀더 구체적인 묘사들로 추리물의 면모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장르가 추리소설인가?) 연극은 특별한 긴장감이 있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그래서 중간무렵부턴 졸음이 밀려온다. 졸 정도로 심하짐는 않았지만 30분정도는 졸렸던거 같다.
좀더 극적으로 만들수도 있지 않은가? 그 피자배달하는 놈은 뭔지. 형인 워렌의 진실은 무엇인지 도데체 카렌은 어떤 확신으로 그와같은 결론에 치닫게 된건지. 에릭을 대학 보내기 위해 자해를 했다는데 보험금을 전혀 못받았던 가난한 가정에서 에릭은 어떻게 대학을 간걸까?
소설 원본에도 이와같이 막 건너뛴건가? 아니면 연극에서 모두 잘라버린건가? 불신의 끝으로 엄한사람들의 파멸만을 이끈다고 하기엔 지미나 카렌은 다른 갈래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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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일이 있어서 특근 아닌 특근을 하게 됬다. 너댓시간 있으니 졸리워 회사의자에 앉아 수십분 졸음 하지만 이상하게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 뭘 그리 힘든 삶을 산다고 피로가 풀리지 않을까 신사동에서 이사하기 전에 첫눈이 많이 내려서 무척 기뻤는데 그 후론 눈다운 눈을 서울에서 본 적이 없다. 약간 흣날린정도. 오늘도 청명하고 싸늘하고 냉정한 하늘만 무심하다. 춥지만 막상 겨울옷을 꺼내 입기엔 무엇인가 내키질 않아서 아직도 늦가을 옷에 조끼 한개를 껴입고 다니니 올 겨울은 다른 해보다 조금 더 춥게 다가오는거 같다.
송년판소리는 안숙선 명창의 독무대같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번이 두번째 공연을 보는것이지만 특이하긴 하다. 이 좋은 무대를 오래도록 왜 이분의 정기 공연장이 되었을까? 그런데 오늘은 좀 다르다. 무엇인가 분위기가 기념하는듯한 약간은 침침한 분위기
시작부터 홀로그램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홀로그램이 아닌거 같은데 왜 홀로그램이라하는지) 며칠전 찍은 안숙선명창의 저장 판소리를 틀어준다. 왜 이랬을까? 그냥 명창께서 나와서 직접 불러주시지 이상한 퍼포먼스는 왜 하는걸까?란 의문이 들다가 문득 '안숙선명창께서 연세때문에 이제는 더이상 창을 못하실정도가 되셨나?'란 약간의 불안한 기분이 감돈다. 2년전인가 3년전이가 그때 송년판소리엔 그래도 건강하셨던거 같은데..
아무튼 1부 한시간 무대는 이렇게 불안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제자분들이 나와서 모든 공연을 했다. 안숙선명창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와중에 '사랑가'는 왠지 좀 그랬다. 손녀라고 하는데.... 아무리 같은 길을 나섰다곤 하지만 어설프디 어설픈.. 이런 좋은 무대를 손녀라는 이유로? 그냥 예쁘고 귀여운 꼬맹이정도던데. 다른 훌륭한 제자들이 많고 많을텐데 뭔가 아쉽고 섭섭한 무대였다. 나머지 모든 공연은 말하면 입아픈 멋진 공연으로 평생을 몸바친 말 그대로 전무가들의 공연이니 아무리 못해도 프로패셔날 그 자체다.
새타령과 추월만정은 왜 그리도 슬픈지.. 눈물이 잘 나는 편이 아닌데 눈꼬리가 쓰라리다.
피날레는 역시 마지막 단원인 안숙선 명창의 명예로운 상패수여식을 하는데 재자들이 부축이며 나오는 모습에 아~ 내년 연말엔 뵐수 있으려나.. 안타까움과 속상함이 반복된다. 그럼에도 민요 몇 소절 하실때에는 쩌렁쩌렁 하신것을 봐서는 소리에 대한 열정과 애정만큼은 그대로인듯 싶다.
조금 힘드셨어도 앉아서도 좋으니 판소리 한두대목 해주셨면 어땠을까란 안타까움도 든다. 관객인 나를 위함이 아니라 소리로 평생을 관객과 함께한 안숙선명창 그 자신을 증명하기 위함의 무대로서
한편으론 다행이라고 할까? 안숙선명창은 수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두셔서 외롭지 않으시겠단 안도가 든다. 아직도 충격적인 기억으로 공옥진여사 말년 다큐멘터리가 떠오른다. 예인의 안타까움일지 시대와 맞지 않아 대중으로부터 냉정하게 버림받은 예인의 마지막 모습 문화예술이란게 때론 냉정하게 내동댕이 쳐지기도 하기때문에 때때로 모르게 사라진 기억의 인물들의 안타까움이 먼저 떠오르기때문에 안타까움이 버릇처럼 앞장서지만 역시나 안숙선명창은 그렇지는 않을거 같은 생각이다.
TV나 우연히 알게 되어 팬이 되었던 그런 사람이 평생 몇이나 된다고 이제는 슬슬 명을 달리하시는데 이건 내가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말이 되지만 그럼에도 오늘 공연에서 제자들이 부추겨 나오시고 부채를 한 손으로 펼 힘도 없으셔서 양손으로 힘겹게 펼치시고 제자들과 민요를 맞추시는 안숙선명창을 보고있노라면 한사람 인생의 끝자락은 어떤 환경이나 어떤 상황이라도 기쁘게 맞아주긴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오늘 공연은 눈꼬리에서 눈물이 마르질 못했던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