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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는 카스트 제도가 폐지되었다곤 하지만 아직도 어느정도 유지되고 있는거 같다. 조선 말 노비제도 폐지되었지만 1900년대초까지 노비 취급 받는게 없어지지 않았으니 쉽지 않을것이고 인도는 땅도 크고 인구도 많아서 오랜시간 세습됬던것을 일순간에 바꿔놓을수 있겠는가. 특히 지배계층은 계속 유지하려고 하니 쉽지 않을것이다. (7개의 언어가 있다는걸 보면 최소한 7개국의 연합국 형태라고 봐야하지 않나)
도비왈라란게 빨래하는 사람이란 뜻이라는데 불가촉천민들의 생활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몇년도인지는 모르겠다. 브라만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라훌이 외국으로 유학도 가고 카스트도 폐지된 후 인거 같으니 1990년대 후 2000년대 무렵이겠지.
아무튼 말 그대로 서민들의 삶이다. 한국은 과거 달동네나 천계천 판자촌이 그와 비슷하려나.. 어차피 카스트는 국가차원에 폐지되었으니 차별 하진 않겠지만 문제는 공부를 할수 없다. 돈이 없으니.. 공부를 하려고 해도 안되겠지..
이런 환경에서 빨래하는 아버지의 강요로 공부하고 싶어하는 실파는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고
도비들을 관리하는 라훌의 아버지는 라훌을 외국으로 유학보낸다? 뭐든 대가리들은 잘먹고 잘 사는건 세상 이친가? 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들어와 인도의 한 정치인과 연이 되어(라훌 아버지의 노력으로) 자신의 고향에 이상한 사업을 하려고 한다. 빨래터를 없애고 세탁기를 넣어서 빨래하겠다는 구상.. 세탁기는 무상으로 설치하겠다는데 이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도비들을 없애겠다는 소린지.. 라훌의 이상한 이상은 좀처럼 이해되진 않는다. 세탁기가 이곳에 설치되면 도비들의 일자리는 사라질게 뻔한데 정치인의 말에 현혹된것인지 자신의 야망을 위해 자신의 고향사람들을 포기한건지..
이런 관계속에도 행동파가 있으니 바로 실파. 한맽힌 여성이고 라훌의 설득으로 라훌의 이상을 함께 따른다.(이상이 뭔지는 모르겠음)
깡패는 언제나 비슷한 역할을 하는거 같다. 물론 극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 깡패들의 삶은 모른다. 아무튼 어떤 연극,영화를 보더라도 그 행태는 비슷하다. 주도적이지 못하고 빌붙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모든 수단을 이용한다. 주로 폭력이겠지만 아무튼 명분을 어떻게든 만들어서 합법적이며 합리적이란 허울을 씌우려 애쓴다. 이 플롯은 어딜가나 똑같은데 왜 그런건지 모르겠다. 실제로 그런건지. 너무 많이 나와서 작가 자신도 모르게 세뇌된것인지
연극은 전체적으로 몰입감은 괜찮았는데 실파가 갑자기 감정이 폭발한다고 할까? 왜 저러지? 라는 대목이 한두곳 있는거 같은데 워낙 거세게 밀어붙이는 통에 큰 반감으로 다가온다. 집중해서 본다고 봤는데 순간 놓친부분이 있었던건가? 그래서 저 배우의 감정선을 이해 못한건가?
전체적으로 보면 클리세도 좀 보이지만 110분 정도 되는 짧지 않은 공연치고 크게 지루함 없이 볼 수 있었다.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행태인지 아니면 내면의 추악함인지 불합리한 시스템에 순응하는 것이 인도인들의 미덕이라 역설하고 싶은건지 전체적으로 산만하고 많은 감정선들이 겹쳐있지만 잘라내면서 보면 괜찮았던거 같았다. 주변을 보면 조는 사람도 제법 있고. 그 조는 사람때문에 방해받는 사람도 있고
아마도 이 극에서 가장 현자는 프리타일거 같다. 왜 프리타는 교육을 받을수 있었던건지 이해는 안된다. 실파는 일을 시켰는데 둘째인 프리타는 왜 학교를 자유롭게 다니지? 환경이 좋아진것도 전혀 없어 보이는데. 권선징악 뭐 그런 드라마는 없다. 그냥 못 사는 사람은 좌절하고 억울하게 피해보고 돌파구를 찾으려 애쓰지만 이용만 당한다. 마지막에 프리타가 세탁시설을 부순건지 플랜카드 한개 떨궜을뿐인데 정치인이나 라훌, 깡패가 두려워하는데 그 플랜카드 한개 떨구면 모든 사업이 물거품이 되는 골든키였을까? 알수 없지만 아무튼 사업이 물거품이 된거 같다. 프리타의 결단으로..
인도의 천민의 삶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그들을 보며 한국의 현실을 투영하고자 했나. 그러기엔 너무 멀고 다른 세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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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쉴드 라이프? 어떤 의미일까. 보호막이 없는 삶 정도? 여기서 보호막은 기후가 변화되어 사람이 살수 없는 환경이 된 지구의 외적 형태를 뜻할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빈민에 대한 삶을 말하기도 하는거 같다.
지구 기후를 핑계로 밀려난 사람들의 삶을 말하는데 여기서 온난화 이전 세대와 온난화 이후(쉴드가 필요한세대) 태어난 세대가 나온다 한국에서는 기득권층이 세대간 이간질을 지독하게 해놔서 극 중 상황이라면 서로 치고박고 싸우지 않았을까싶지만 그냥 평화롭게 살아간다. 돈독한 가족같지만 그다지 의미 없다. 그런데 조금은 특이한것이 기후로 인해 지구가 망가지기 전 삶을 살았던 노인은 과거를 회상하고 그리워하지만 막상 어떤 도전따위는 하지 않는다. 반면 그때의 그 세상을 알지 못하는 젊은 청년은 빈민인 자신의 삶을 이겨내려고 이상한 재단의 꼬임에 넘어가 세상을 바꿔보려고 떠나는 시도를 한다. 기억속엔 지구의 옛모습이 없지만 지금의 삶이 너무 팍팍하니 이겨내려고 하는데 더 나은 삶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그것을 동경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인간이 지금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지향하고 노력하는것은 수많은 매스컴들이 이러한 허상을 계속 주입시키기때문아닌가. 과거 SF(과학소설)영화를 보더라도 항상 저 위에서는 무엇인가 유토피아같은 세상을 홍보한다. 물론 손에 닫지 않는 먼곳에서 선전을 한다. 그러니 인간들이 저 삶을 동경하도록 만드는데 지금 이 쉴드에서 살고 있는 젊은이는 무엇을 위해서 이러는 것일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극 자체가 그다지 치밀한 구성을 갖고있지 않다.
쉴드를 업그레이드하고 고치는데 드는 비용은 이상한 알바같은것으로 돈을 버는 모양세인데 이 부분도 엉성하기 그지없다. 한국 SF의 특징이나 심각한 문제점은 미래의 어느 세계를 대충 그리면 있지도 않은 세상이니 되겠거니 하는것이다. 치밀하고 세밀하면서 집요해야 하는 연결성이 결부된다. 그래서 한국의 SF는 대부분 똥망한다. 동기가 명확해야 인물들의 행동이 어느정도 납득되고 설득되고 동화되는것 아닌가..
그나마 2050년쯤엔 가능할듯한것정도는 도우미 로봇정도? 지금 기술발전을 보면 25년 후면 충분히 가능할거 같긴 한데 문제는 빈민이 구입할수는 없을것이다. 그정도로 보편화되기엔 멀고 험한 분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허구 세계의 약간은 수용가능할 수 있는정도로 넘길수 있다. 그러기때문에 로봇 배우의 행동은 매우 공감이 된다. 그리고 그다지 갈등요소에 들어오지도 않기때문에 더욱더 신경이 안쓰인다. 만약에 두 배우간의 갈등속에서 로봇이 중재하겠다고 끼어들었다면 아주 짜증이 날뻔했지만 그런 사고는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흐름에서 독특하거나 신선하거나 긴장감 같은 몰입할 수 있는 것들을 찾긴 어려웠다. 처음엔 스릴러인가?싶다가도 갑자기 모 단체가 나왔지만 허무하게도 자신의 잇속만 챙기기 위한 존재정도 (세기말에 나타나는 사이비같은 존재들. 사람들의 돈만을 노리고 영달만을 추구하는 집단들)
어떠한 배경이 되는 무엇인가 필요할듯 한데 쉴드란게 구체적으로 왜 필요한것인지 모르겠고 이산화 탄소가 왜? 지구 온난화와 이상한 복장은 어떤 연관성이 있는거지? 자외선은 밤에 다니면 해결되는건데. 모르는 유독가스가 있나? 아니면 이산화탄소 농도가 사람이 살수 없을정도로 많은가? 이산화탄소가 실내에서 많이 배출된다고 세금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건 무슨 헛소리지? 산소를 중앙에서 재공하는 시스템인가. 쉴드 비용은 개인이 직접 지불하도록 되어 있는데
다들 뛰어난 연기로 눈으로는 거슬리는 것이 없지만 머리속에선 거슬리는게 한두가지가 아닌 엉성한 연극이 아닐 수 없다.
연출가전이니 연출께서 좋은 작품을 선정하면 되는 문제인데 왜 이런 엉성한 작품을 선정한것인지.. 배우들 연기도 훌륭한 일품 연기자들인데 작품이 좀 섭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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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어 두주째 목요일에 회사에서 두시간 거리에 있는 국립국악원을 찾았다. 이곳이 이렇게 멀었다는것을 20여년동안 몰랐으니(20여년동은 근처에 살았음) 올적마다 다음엔 평일엔 오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지만 막상 공연을 보면 다음엔 뭐가 하나 찾게되니 이 뫼비우스 띠같은 윤회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런지.
예악당에 이런 좌석이 있는지 몰랐다. 나와 내 뒷자리 높이 차가 급격히 커서 뒷 사람이 발을 꼬고 있으면 그 발이 내 머리 옆에 온다는것이다. 왜 이렇게 개그지같이 설계한거지? 병신같이 설계한 새끼는 어디선가 잘먹고 잘 살고 있을텐데 이렇게 구분되어있는 구간이 1층에만 몇줄이나 된다. 예약당에선 이딴거 신경 안쓰겠지.. 개놈들
좌석 예매할땐 중간 자리를 잘 선택하지 않으면 뒷사람의 발이 내 얼굴 옆에 있을수 있다. 다시 생각해도 개같은 구조다. 최소한 칸 막이라도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이번엔 굿들만 4가지가 엮여 있다. 전통의 재발견에서 전통이란게 굿만 있는것을 분명 아닐진데 예전 '꽃신 신고 훨훨'같이 망자를 기리는 공연이라면 충분이 이해되지만 물론 굿이란게 망자만을 위한 문화도 아니고 잘되길 기원하는 당시 백성들의 애환이 담겨있는것이긴 한데 그럼에도 제목과는 사뭇 다른 기분이 든다. (홈페이지에 설명은 되어 있었음. 내가 안봤을뿐임)
난 아직도 국악 관현악단의 존재를 느낄만한 공연을 본적은 없다. 오늘 역시 '그다지'라는 기분이었다. 이유는 아무래도 네개의 굿이 나오는데 한국의 굿 문화에서 등장하는 악기라고 해봐야 태평소, 꽹과리, 북, 징 정도 아닌가? 그런데 관현악단이라니.. 완전하게 각색된것도 아니고 그냥 예전에 있던 그것에 관현악을 덧붙여놨다? 이것을 국악오케로 편곡했다곤 하는데 국내악기 특색에 맞는 편집이었나?라는 것은 나같은 초짜 입장에선 그다지란 말밖엔 달리 떠오르는 생각이 없다.
일단 겹칠때 소란스럽고 창자가 굿을 하는데 국악현악단이 합치기 시작하면 창자의 말이 전혀 안들린다. 이게 어느정도냐면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공연을 하면 술취한 노인이 나와서 흐느적거리는거 같은 전혀 안섞인 이상 두 부류가 따로 존재하는거 같다.
서양에서 악기 협주곡은 솔로일땐 철저하게 그사람을 돋보이게 관현악은 바닥에 스스로 깔릴뿐이다. 그리고 합주일땐 구성으로 흡수되어 전체에 음악의 흐트러짐이 없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번 공연들은 오케와 섞이기만 하면 다 흐트러진다. 오케의 멜로디가 올라오는것도 아니고 창자의 구슬푼 노랫가락(굿)이 올라오는것도 아니다. 결국 산만하기만 한 소음과 같은 경우도 적지 않다. 왜 일까? 우리도 궁중음악으로 분명히 합주란것을 해왔고 편성도 대규모로 전체적으로 조화도 이루었는데.. 아직은 노랫가락과 합치는것이 어색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판소리 다섯바탕이라고 해봐야 북 말곤 없지 않은가. 민요에 들어가는 악기라고 해봐야 장구, 쾡과리, 징, 태평소, 피리 같은것뿐 아닌가
현악기에 포함된것은 시조같은 묘한 음율의 세계였고 그마저도 지금 그 음율을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런와중에 대편성으로 콘체르토를 하겠다니.. 하지만 계속 시도되야 한다. 서양 음악중 지금껏 남아있는 이유도 지금의 열배, 백배 이상이 나왔기때문에 그중에 옥이 살아남은것 아니겠는가. 그 중에 사라남는것들. 그것들이 판소리 다섯바탕이고 민요고 그러겠지. 한백년 지나면 이중에 유명한것들이 남아서 세기의 명곡 반열에 오르지 않겠는가.
그래도 명색이 전문가들이니 조금은 조화, 벨런스 화음에 신경써주길 기대해본다.
예악단의 개같이 단차가 심한 의자 배열을 좀 바꿔라. 어떤 놈이 머리통 옆에 뒷사람 발을 보고 싶겠냐. 개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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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춤이 언제 만들어진거지? 오래된것인지 근래에 만들어진것인지 그리고 어떤 뚜렷한 줄거리가 있는 내용인데 이런건 단순히 춤이라 하면 되는건가 그냥 춤(무용)공연이라 하면 되는건지 그러기엔 너무 두리뭉실한거 같고 범위가 너무 넓은데
단테신곡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죽음에 대한 세계를 묘사한다곤 하지만 이런 글을 보지 않고 보면 '아~ 저승을 그리고 있군'이라고 알 수 있는건가 나는 춤으로 나타내는것중엔 그나마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그리움, 사랑, 환희, 분노.. 뭐 이런 비교적 단순한 표현들정도나 알수 있는정도지 이게 어떤 공간, 배경, 변화.. 등 그들이 말하는 수많은 의미를 구분하진 못한다.
음악도 어떤 감정의 흐름정도나 간접적으로 느낄뿐 영화같은것에서 보면 서로 연주로 대화한다거나 하는 그런 허무맹랑한 경지에 오른적도 없으니 그 깊이가 매우 얕다고 할 수 있다.
이번 공연 환생을 소개한 팜플렛을 보고나서야 그렇구나 할뿐이었다. 그런데 조금전 팜플렛을 보면 무척 놀란것이 있는데 각 무용수들의 배역의 이름들이 있었다는것이다. 사택왕후, 선화공주, 무왕, 지명법사, 수문장 백제때의 이야기인가? 누가 사택왕후고 누가 선화공주지? 전체적인 줄거리가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것일까?
단테의 신곡은 사후의 세계, 속칭 저승에 대해 이야기 하니 이것 역시 그런거 같다. 그런데 옛 이야기의 후속, 그래서 외전이라 붙인것인가? 그 후의 이야기 처럼 그러면 단테의 신곡이 아니라 불교적 사상이 훨씬 깊은거 아닌가? 전체적인 느낌도 윤회에 가깝게 흘러가던데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깔고 가는지 그에 관련한 무엇이 있으면 좋을거 같지만 전혀 부연설명이 없다. 춤이란게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공연예술의 한 장르겠으나 이야기를 붙여놨다면 나같이 이해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개략적이지만 조금은 상세한 줄거리를 알려주는건 어땠을까싶다. (공연중 알려달라는게 아니고 팜플렛 혹은 홈페이지 내에서라도)
막이 끝날때마다 주제를 한줄로 표기하기때문에 일단 상황은 알겠지만 저들은 저 춤을 익히면서 안무가, 감독이 끊임없이 그때의 그 감정을 살리기 위한 배경설명을 많이 했을텐데 정작 이것을 받아드려야 하는 관객은 어떠한 정보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냥 너는 떡이나 먹고 가라. 떡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왜 만들어졌는지, 언제부터 먹기시작했는지 따위는 신경쓰지말고 입에넣고 씹다가 삼키면 되. 라는 것으로밖엔 다가오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해도 소화는 훌륭히 잘 된다. 왜냐하면 전문가들이 맛있고 소화 잘되게 잘 만들어놨으니까. 그래서 감동이 없었다는것은 아니다. 충분히 감동적이고 행위예술에서 받는 감동의 종류는 표현하기 힘들정도로 많기때문에 그중 몇가지에만 걸리면 마음은 동요된다. 저 무용가들의 미친 춤사위는 나를 흥분시키에는 충분한 능력들이나 역시 섭섭함이 남는것은 어쩔수 없다. 나의 문외한을 탓해야겠지만 이건 지극히 전문가들만을 위한 공연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오페라나 발레 기타 음악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공연에서 주된 것들(무용,노래, 음악극 등)에선 음악을 연주는 최대한 멋지게 하지만 정면에 드러나게 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주가 되는 것에 집중하기 힘들기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공연은 연주하는 분들이 무대 윗쪽에 제법 잘보이도록 세팅되고 연주의 현란함 또한 잘 보이도록 임의로 설정한거 같다. 그것때문인지 가끔 무용수들을 봐야 하는데 연주자를 보게 되는 내 모습을 보게 된다. 왜 이렇게 해놓은거지? 춤 스케치라는 슬로건을 내건 공연이면 저 무용수들에게 집중하도록 해줘야 하는거 아닌가?
늘 외지고 어두운 그늘에서 고생하는모습이 안쓰러웠나?
다른 특이한점은 여자 무용수 한명은 척추 전체를 문신을 한 사람이 있었다. 어떤 독립적인 배역이 있는 사람이면 이 사람을 위한 분장이겠거니 넘겼을텐데(남자들도 문신 같은 무늬를 몸에 많이 그려넣어서 주홍글씨 같기도 하고 계급을 뜻하는거 같기도 한 그냥 무늬 그림 문신) 맨몸이 잘 보이는 직업인 무용수가 실제 문신을 한다고? 영화 '존윅'에서 나오는 발레리나들이 문신을 엄청 하고 있긴 하지만 이건 영화에서 어떤 상징을 뜻하기때문인거 같고 몸의 선을 중시하는 무용수가 시선을 빼앗기는 특이한 짓을 한건 이번 처음봐서 좀 뭐랄까? 보는 내내 신경쓰여서 영 별루던데 차라리 남자배역을 맡아서 저들처럼 가짜문신을 했으면 신경쓰이지 않았겠지만 같은 역할들의 다른 무용수들과는 다른 그 튀는 모양은 꽤나 별로였다.(왜 했을까? 척추 수술을 했나?) 분장인데 내가 착각한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무용은 서양고전이나 한국고전과는 제법 다른거 같지만 그렇다고 난해한 현대예술도 아닌거 같고 좀 쉽게 풀어내려는 수많은 무대 장치들과 뛰어나며 직관적인 효과음과 음악들 그리고 무용의 조화로움 내용을 이해못하지만 그 흐름의 완결성이랄까? 표현의 아름다움과 경의로움을 느끼게 했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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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선보이는 구성이라고 하는데 공연은 네가지(적념,여창가곡,남도시나위,승무)로 구성되어있어서 여느 국악 공연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독특한점이라 하면 한공연이 끝나면 그 중간에 명상가(이정은)라는 분께서 나와 관객과 함께 한 5~10분정도 명상을 알려주고 함께 명상을 한다. 그러다보니 전체 공연의 한 30분정도는 명상을 했던 특이한 공연인데 공연과 잘 붙는가는 좀.. 그리고 공연장에 공조기 소리때문인지 고요함이 없고 기침하는 사람도 있고 무대뒤에서 대화하는 소리가 다 들리는 통에 명상을 하고 공연에 집중할수 있는 기획은 좋았지만 진행에서 좀 미흡하지 않았나싶다.
그리고 3일간 공연하는데 가만히 보니 3일간의 공연이 모두 다르다. 3일모두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은 공연을 내년에 또 할것도 아닐테고 이런식으로 하게되면 하루에 네가지씩 총 12가지 공연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을 하게되는데 문제는 과연 이 12가지 공연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레퍼토리가 많아서 어쩔수 없더라도 기획을 좀 다양하게 하고 기획 한개당 며칠간의 공연은 가급적 같은 공연을 하는게 어떨까 싶다. 이렇게 3일동안 모두 다른 공연을 하면 이중 한가지만 볼수없는 나같은경우 똥싸고 닦지 않은것 마냥 찝찝한 기분이 든다. 공연을 봤는데 3분의1만 본거 같은 그런 개운함이 없는 느낌
그리고 명상시간을 제외하면 공연이 매우 짧다. 평일 공연이니 너무 길어도 집에가기 불편하긴 한데 국립국악원(예술의 전당)이 외진곳에 있다보니 회사에서 끝나고 재시간에 도착하려면 고생좀 하는데 너무 짧으면 아무래도 섭섭함이 커지는건 어쩔수 없는거 같다.
평일에 이런 품격있는 공연 한편 기분좋게 보고나와 늦은 시간 집에 들어와서 잠을 청할때 그 안정감, 만족감, 충만감, 뿌듯함 등 수많은 기분들이 몰려들어서 힘들더라도 보고 싶은 공연은 안볼수 없다. 가급적 평일은 이런 국악,클래식과 같이 좀 시간이 지나 농익을대로 농익어 웬만하면 감동받는 장르가 아무래도 좋지.
이번 기획은 좀 엉성했을지 몰라도 공연예술을 접하기 전에 몸과 마음을 차분히 하면 한결 집중이 잘 되서 중간 중간 명상전문가 나와 명상하는것도 괜찮은 생각같다. 너무 형식화하진 말고 가볍게 다음 공연에 집중할수 있을정도로만 그리고 시간은 최대한 짧게, 주된 공연의 시간이 너무 짧아지면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받을수도 있으니 살짝 맛만 보는정도? 심호흡정도?
이번 공연에서도 느낀거지만 난 승무를 참 좋아하는거 같다. 그 속에 숨긴 의미는 공부해본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바라춤도 그렇고 오늘은 남성이 나왔는데 기개가 있어보이기도 하고 확실히 남성은 여성에 비하여 힘이 좀더 있는 느낌이지만 남녀 크게 다름은 없을거 같다. 승무를 보고 있으면 종교적 색채보다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거 같기도한, 신비한 세계를 간접적으로 엿보는 기분도 들고 품격있게 절제해놓은 느낌이라 감동마저 절제되는 느낌이다. 인도나 중국에도 이런 승무가 있는지 찾아보면 중국은 무술로 발전했다는데 쿵푸를 보면 격투보단 어떤 선을 유지하는 일종의 예술 같긴 하다.
평일에 보는 공연은 신사동 살때가 교통이 좋아서 좋았는데.. 밤에 밥 먹을때도 많고. 군자동은 10시정도 되면 술집 말고 밥집은 빨리 닫는거 같은데 이게 정상이지만 그래도 출출하면 좀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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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보면 한 인물의 심리변화를 나타내는거 같다. 침묵하다가 어떤 사건으로 의심하고 그러다가 깨달음으로 그런데 오산이다. 제목만으로 추정하는 것은 이제 그만해야 할 시기인거 같다. 제대로 맞추는 경우가 극히 없는데 왜 시놉을 보지 않고 제목만 보고 예매하는건지..
물론 예매한 후에 잊고 살기때문에 예매할때의 추정이 기억나는 경우는 잘 없지만 그래도.
천주교의 신부 3명이 등장한다.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같이 캐릭터가 극명하게 갈리는것은 아니지만 각각 인물마다 개성이 있고 보통 세명의 친구라고 하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구성원이지 않을까싶은 설정이다.
중계하는 한 사람과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 그러나 셋 모두에게 얘기못하는 애환을 가지고 있다. 젊었을 한때의 추억도 일부 공유하고(이러지 않으면 친구라 하기에 좀 그렇지)
기승전결이 명확하다고 할까. 줄거리는 뻔할뻔자지만 보이는 흐름과 구성, 배우들의 일품 연기와 소소한 재미들 소재가 다양하면서 지루하지 않게 잘 꾸며져있다. 다만 내가 이쪽 세계의 용어를 잘 몰라서 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안되는 것들도 좀 있는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그냥 흘려도 되는 그런 시시콜콜한 우리내 삶 같은 이야기들이다.
친한 친구 셋이 모여 술을 마시다가 한 친구가 자신의 현실과 맞지않는 쪽으로 흘러가는것을 나머지 두 친구가 막으려다가 결국 자신들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아 한숨 푹푹 쉬는 그러면서도 은연중 끈끈하게 연대되어 있는 동무들..
예전 TV 드라나 '세친구' 같다고 해야 하나.. 잘난놈, 덜 잘난놈, 노는놈 셋이 친구가 안될거 같지만 동무가 된다는 것은 공통된 관심사와 어느정도 맞는 정서와 표현력 등 많은 것들이 맞아야 동무가 될텐데 연극에서는 그러한 점을 잘 파고든다.
그래서 서로 말싸움을 독하게 하더라도 찐득함이 잘 표현된다. 흐름도 어느정도 예상이 충분히 되는 상황이라서 마음 편히 저들을 받아드렸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한 신부가 신부직을 버렸다면 어땠을까? 연극을 좀더 길게 가고 해피엔딩으로 끝내기엔 어려운 진행이겠지만 이게 더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천주교 신부는 교회 목사가 될순 없는건가? 그리고 신부가 그만둘땐 교황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고 연극에서 나오는데 천주교는 세계의 거대조직이란게 거짓이 아닌거 같다.
지금생각해보면 전체적으로 밝은 늬앙스의 연극이었나? 싶기도 하다. 서로 싸우는 것이 거의 3분의 2는 되는데 중재하는 신부가 있어서 극단적으로 흐르진 않았지만 절반 이상을 주된사건과 시시콜콜한 사건들로 언성이 잦아들때가 없었는데 말끔하게 끝난것도 신기하고 극장을 나올때의 뒷맛도 가볍다. 신파같은거 없고 한국드라마처럼 일순간에 개연성은 개나 줘버리고 끝내버리는것도 없다.
이런 드라마가 갖는 특징이겠지. 뻔하지만 그 뻔함을 뻔하지 않게 잘 꾸며놔서 누가 봐도 삐딱하지 않을 조금 큰 극장에서(달오름이나 정동같은곳) 공연해도 충분히 매력 넘칠 연극으로 예쁜 가을날에 적합한 연극이 아니었나싶다.
그런데 직장인 할인은 뭘까? 백수는 어떻게 하라고? 제발 이런 이상한 할인은 없애주고 만원 낮은 가격을 기본가격으로 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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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녁 7시30분 공연인데 중간 쉬는 시간 포함해서 170분? 가끔은 이렇게 한밤중 공연 한편 기분좋게 보고 집에 오는것도 좋긴 한데 집까지 또 한시간을 가야하니 쉽지 않다. 올해는 앞으로도 적지 않은 편수를 평일공연으로 예매해놨으니 조금은 한숨이 나온다.
흔한 심청을 생각하고 왔다가 큰코다칠수도 있을수 있지만 전체적으론 그렇지 않다. 일단 한 90%는 심청전 줄거리를 거의 그대로 따른다. 1인 판소리 장르를 떼창으로 하니 다들 끝까지 좋은 목 상태를 유지해서 안쓰러움도 없고(한명이 하는 판소리 완창은 언제나 힘들어 보임)
현대적인 의상, 현대적인 배경으로 바껴있다. 현대물로 완전히 바꿔놓은것인가? 고전 '로미오와 줄리엣'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현대 버전같이?
인당수에 빠지는 부분까지만 봤을때는 옷만 현대적이지 그냥 고전물인가 싶었는데 끝은 그것과 거리가 멀어보이고 이해하기도 쉽지는 않았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들이 눈을 뜬다?까지는 내용 흐름상 장르가 판타지니 그러려니 하는데 이번 각색된것은 저 소녀의 정체는 무엇인가? 심봉사는? 환경은 조폭에게 당하는 일가족을 말하는거 같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무엇을 상징하는지 이해안되는 부분이 많다. 파격적이네 뭐네 하긴 하는데 기존 극에서 잔인성을 부각하게되면 웬만해선 파격적이 된다. 이 창극 역시 노랫가락으로 부드럽게 넘기는 부분을 좀더 현실감 있게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져들때 다리를 묶고 무거운 물체에 매달았다거나 하는건 아무리 심청이의 심정이 굳건하더라도 죽음앞에선 쉽지않기때문에 잔인한 현실의 실감나는 설정이다.
전제적으로 다른 공연에서는 접하기 쉽지 않은 기괴하면서 아방가르드(전위적)한 창연극인데 이런류의 특징이 너무 작가주의적이라서 이해해야 하는 관객입장을 잘 고려되지 않는다는것이 심각한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그래서 한국사람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알고 있는 심청전을 보면서 ???????? 라는 물음표가 나오게 하는것이겠지
좀 그렇고 그런 내용을 무대장치와 음악 그리고 창으로 떼우고 있는거 같다.
처음보는 광경으로 카메라맨 한명이 라이브로 계속 무대를 왔다갔다하면서 찍는다 그것을 무대 윗쪽에 실시간으로 적절하게 화면으로 뿌려지는데 개인적으로 저장영상을 무대에 플레이하는걸 싫어하지만 이번은 획기적이라 해야 할지 단순히 막 찍는걸 그냥 보여주는게 아니라 잘 짜여진 동선 그대로 연출이 원하는 그림을 그대로 만들어가는듯, 관객은 영상이나 무대의 배우들이 하나된 공연을 보는듯 거슬림 없는 훌륭한 무대를 만드는걸 보면서 감탄을 안할 수 없었다. 특히 흑백으로 표현되는 영상은 그 특유의 자극적으로 부각되는 표현은 일반 무대의 배우들에게 볼 수 없는 모습으로 인물의 이중적 모습을 실시간으로 감상할할수 있다. 다만 카메라맨이 기계를 주렁주렁 매달고 왔다 갔다 하니 시선을 빼앗기는거 같아서 좀 그렇지만 아무튼 오랜만에 느끼는 신선하고 창의적 연출을 본거 같은 뿌뜻함? 기분좋음? 대충 그런느낌이긴 한데
심청전 배경엔 분명 인신공양이 있었던 무지한 세계였을것이다. 왕과 함께 죽는 순장도 조선이전에 있었을정도였으니 인류 역사 한 1~2백년만 앞서가면 얼마나 미개한 생태계였는지 단번에 알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 인신공양은 대부분 여자아이, 갓난아기등을 했다는 것이다. (여아를 주로 했던것은 아무래도 전쟁으로 남자수가 부족하고 성인여자는 출산과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니 그런것이 아닌가생각됨)
아무리 그렇다고 지금 시대의 여자 아이들이 떼로 웃으면서 나오고(거의 백명은 되보임) 나중에 심청이가 죽고 다시 살아났을때도 떼로 서있는 장면은 뭔가 섬뜩하다. 특히 초입부분에 아이들이 막 웃을땐 공포심마져 들던데 일부 중년 여성들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귀엽다고 좋아하지만 나는 왜 공포심으로 다가왔을까? 인위적 웃음소리를 떼로 들어서 그런것인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웃어서 그런가? 물론 나는 저 웃음을 공감못한다. 심청이의 추정나이는 15세정도로 중학생정도인데 저 아이들은 누가봐도 초등생들이니 심청이 나이 15세면 그 시기 기준으로 결혼할 수 있는 나이로 예전 환경으론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시기라서 아이로 보기엔 무리가 있는데 저 기괴한 아이들의 설정은 무엇일까? 작가가 당시의 나이와 지금의 나이를 착각하는것인가? 꼬맹이 철부지 아이의 심청이를 생각하는것인가?
그리고 현대의상까지는 그러려니 하는데 심청이의 어머니(곽씨)가 돌아가셨을때 마피아, 조폭같은 의상은 뭐지? 심학규가 엄청 잘 사는 조폭인가?싶었다. 그런데 조폭같은 사람들은 심학규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냥 상가집에 온 사람들인데 한국사회에서 상가집에 방문한 사람들의 태도가 저렇다고? 어디서 조폭영화만 잔뜩 보고 온것일까? 이 연극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심청전이 무슨 전쟁, 스릴러, 폭력물인줄 착각하지 않을까?
그리고 심학규가 심청이 젖동냥할때 정말 무서웠다. 검은색 상복을 입은 여자들이 저고리 한쪽을 모두 풀어해치고 무표정하게 서있다. 그것도 수십명이.. 마치 자신은 젖동냥하는 마네킹인냥.. 그래서 더욱더 심봉사가 조폭 두목이고 저 여자들은 어떠한 환경으로 억지 젖동냥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인식했다. 물론 그것과는 관계없는 나만의 오산같다. 이런 전위적이며 추상적인 장르의 특징인 작가가 꼴리는대로 설명하니 좀 거북스럽고 이해가 안되는것은 필수인가. 이런것을 파격이라 하면.. 심청이가 심봉사를 이용해 돈벌고 장기 팔고 흥청망청 사는 내용으로 바꿔놔도 파격이라 포장하겠지.
현대적 해석은 일단 고전의 내용을 충실히 하면서 현대인들의 시각을 가미해서 재해석해야 하는데 이렇게 비꼬아놓고 해석을 달리했다는건 납득하기 쉽지 않다. 이 작가 작품중 '점찌고 옹녀'를 봐도 여성주의적(페미니즘) 시각으로 좀 이상하게 꼬아놔서 비주얼은 좋아도 막상 내용은 별로였는데 이 작가의 특징인지..(작가마다 뷰에 몰빵하고 내용은 겉치레에 불과한 사람도 있고 반대인 사람도 있고)
아무튼 이상한 오해를 받을수 있는 충분함이 있다.
그리고 장승상댁 부인은 무슨 매춘부 알선하는 사람처럼 묘사하는건 왜일까. 조폭 느아르를 만들고 싶었던거인지도 모르겠다. 선인을 악인으로 바꿔놓는것이 현시대의 시선이란소린지 아마도 이부분은 심청이가 막판에 만신창이가 되니 그 일환으로 장승상댁도 그런 주변인물로 바꿔놓은것일수 있긴 하지만 이럴바엔 '심청'이란 제목을 쓰지 말던가. 이게 이렇게 되면 심청전 원전대로 만들어지는 공연을 볼때 색안경이 씌어지지 않겠나. 선악이 갈리는 장르는 아니지만 묘사된 인물의 성품에 색이 있다면 그 성향은 바꿔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전 조폭을 미화하는 영화가 문제 됬던것은 수많은 사람 중 소수가 미화된 혹은 악화된 것을 그대로 받아드려 사회 문제가 될수 있기때문 아니었나)
그리고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보이도록 만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공양미 300석을 시주하면 눈을 뜰수 있다고 얘기했던 화주승을 거의 악의 화신처럼 그려놓고 있다. 공양미 이야기 자체가 가스라이팅해서 자신의 딸을 사창가(장기 매매인가?) 같은곳에 팔라고 강요하는듯한 나쁜놈의 우두머리처럼 그리고 표현한다. 이름이 요나김(김요나라고 한국 이름표기법대로 사용하는것도 아니고 외국 방식대로 했다는것은 자신은 한국인이 아니라는것을 표현한것일텐데 한국사람 껍떼기를 한 외국인인가? 글로벌시대에 이런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국사람인척 하면서 뒷구멍으로 한국 욕하고 자신의 이익추구만을 일삼는 매국노들이 문제지)이던데 종교적 색채가 묻어나오는건 나의 선입견때문일거 같다. (찾아보면 요나는 남자 세레명이라 하던데 이분은 여성 아닌가?)
전체 배경이 조선시대 어떤 효를 강요하듯 꾸며낸듯한 이런 내용이 아닌 거친 배경에서 생존을 위해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세상에 악마화 된 종교인이 없을리는 없겠지만 심청전에서 화주승이 갖는 의미는 종교에 대한 어떤 망상같은 성찰과 거짓 능력 등이 부각되는 주된 장면으로서 서유기에서 멍청해보이는 삼장법사가 지니고 있는 종교적 상징성과 비슷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인물인데 시정잡배, 사기꾼따위로 만들어 놨다는것은 기독교의 에반겔리즘(복음주의)으로 비롯된 배타주의의 파생이 아닐까? '너네가 믿는 저 종교의 뒷모습은 이렇게 추악한 사탄과 같은 존재다~'라는것을 우회하여 비꼬듯
화주승때문에 심청이는 인당수에서 죽게 되는데 문제는 이로인해 다시 살아나고 황후(조선시대에 황후가 있나?)가 된다는 온갖 설화를 막 가져온듯한 이상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전체 뼈대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고? 그것도 사상적 뼈대가 되는 불교와 도교의 자비롭고 신비로웠던 세계를 개깡패같은 놈으로?
작금의 한국은 이상한 미신에 휘둘려 나라가 개판일보직전까지 몰렸다가 한국 민중들께서 합심해서 간신히 위기를 되돌려놓은 상황이니 종교의 폐해를 모르는바 아니지만 그렇다면 고전을 현대물로 재해석하는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신작을 만들어야지 멀쩡히 있는 과거로부터 사랑받아왔던 한국인 정서에 잘 부합하는(아비가 딸을 파는것 말고) 내용을 가지고 와서 썩어버린 사회에서 치유되지 못하게 만들어놓는것은 어떤 저의가 있는지 솔직히 의심스럽다.
이 공연을 본 사람은 앞으로 심청전을 효녀심청이로 볼 수 있을까? 영화 '아마데우스' 때문에 살리에르를 천하에 못된놈으로 바꿔버렸는데(아무리 영화적 허용이라해도 이러면 안되는거 아닌가?)
효자,효녀란게 과거에 허벅지 살을 도려내어 부모님을 공양했다는 것이 지금 통용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판소리 심청가는 전체적으로 보면 좀 해학스럽다. 심청이 어머니는 가부장적인 남편을 극진히 모시고 심청을 낳았지만 딸이라서 좀 서운해 하기도 하고 (심학규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심학규가 봉사기때문에 부귀영화도 힘든 상황)
심청이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대목은 무척 슬프다만 이 후부터는 심학규와 심청이의 부녀지간 사이도 적당한 그냥 형편 어려운 가정이었다. 딸자식을 어떤 꾀임에 빠져 300석에 팔았다손 치더라도 황당한건 생각보다 심학규의 삶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는것 뺑덕어멈과 동거를 할때도 딸 팔아 공양 후 남은 돈으로 적당히 잘 먹고 잘 살다가 돈이 거의 떨어질 무렵에 심청이는 인당수에 빠져 죽다가 살아나 용궁에서 엄마도 보고 착하게 살았다고 황후가 되서 맹인잔치를 열고 각 고을에선 돈을 줘가며 잔치에 보내니 심학규 입장에는 땡큐 아닌가?
제일 특이한건 심학규는 맹인잔치에 가면서 뺑덕어멈을 잃었지만 홀로가면서 여인네들 일좀 도와주며 밥,고기 등 얻어먹고 옷을 홀라당 잃어버렸음에도 기지를 발휘해 옷, 노잣돈, 담배(당시엔 비쌌다고 함)도 얻는등 웃기게도 좀 황당한 호사를 누린다. 게다가 안씨를 만나서 결과적으론 재혼까지 하게 되는데 안씨는 부자기도 하다. 아마도 심청전에서 승자는 심학규가 아닐까싶을정도
심청전의 특징은 웬만해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행복하게 끝난다는 것. 심청가, 춘향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 이런 한국 공연문화를 보면 한놈만 완벽하게 나쁜놈을 만드는 경향을 보긴 쉽지 않다. 그래서 결국 다같이 조화롭게 잘 살아간다는 황당한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특정 종교적 시선이 가미되면 선악이 확실하게 구분되면서 중간에 선을 딱! 그어놓으려 애쓴다. 이번 '심청' 창극을 꼭 그렇게 볼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3시간 남짓되는 동안 해학은 어디에도 없고 우울하고 암울하며 더럽고 추악하다. 영화 '베트맨'의 고담시티나 영화 '씬시티'같이 디스토피아도 아니고 유토피아도 아닌 못된짓을 하면 적당히 밥은 먹고 살거 같은 세상이랄까?
왜곡된 섹스어필, 이런 배경이라면 당연히 필요하겠지. 괴기스러운 여자들, 북에 피는 왜 발라놓은것일까? 이럴때 피는 여자의 그것을 상징하긴 하는데 그것이 맞을까?
오늘 콘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였지만 퇴근 후 3시간동안 졸음따위는 개나 줘버린 몰입력 끝장나는 창극이었으나 무엇인가 가슴한편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남아있다는것은 전위예술의 특징이려나.. 신선함은 최고인데 무엇이 불편하게 만드는걸까.. 재미있는지 없는지 가늠하기엔 어려우니 두어번은 더 봐봐야 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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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난해하다. 재미있다고 하기엔 무엇인가 좀 심각하게 복재된듯한 아류작을 보는 기분이 들고 그렇다고 엉망이라고 하기엔 또 많은 부분에서 멋지다고 할수도 있고
2022년 초연 된 음악극라는데 내용은 식상함 그 자체다. 어느 독재자의 신변보호, 대회활동을 위해 비슷 사람들 내세운다는 설정이다. 네번째 대역 배우란 말은 사람마다 나눠놓은 역할이 있는데 그중 네번째 역할이란 말일뿐 아무런 의미도 없다. 전직 배우였기때문에 그에 알맞는 대역을 맡은것일뿐이라 이런걸 왜 제목에 넣었는지 모르겠다. 불필요하게 길기만 할뿐..(난 쇼맨이 제목이고 네번째 대역배우는 멀티 캐스팅으로 4번째 배우란 소린줄 알았음)
아무튼 쇼하는 사람이다. 어떤 나쁜놈을 대신해서 쇼를 하는것이니 쇼맨만으로 제목으로서 충분한데 다시봐도 꽤나 구차하고 구질구질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제목은 그냥 '쇼맨'일거란 생각이다. 부연설명, 부재 정도를 일부러 붙여놨겠지
아무튼 한때의 쇼맨이 늙어 놀이공원에서 인형탈을 쓰고 있다가 어떤 사진작가를 눈여겨보고 부탁을 한다. 자신의 사진을 찍어달라는.. 나는 이때 영정사진을 찍어달라는줄 알았다.(분장을 안해서 젊은 사람으로 보이는데 말이 늙은 사람 흉내를 내는것을 보고 늙은이 역할이구나 했지만 그러면 노인 탈을 쓰던가 늙은 네불라, 젊은 네불라 두명으로 좀 나눠서 하던가 분장도 제대로 안해서 저 사람이 늙은 이 인지, 젊은 이 인지.. 꽤나 성의 없는 설정이 아닐 수 없다. (하기 싫은 연극을 억지로 하는건가?) 아주 젊어보이는 사람이 말투만 늙은 이 흉내를 내니 얼마나 이상하겠나...
대충 자기최면을 걸면서 보면 적당히 볼만한듯 하지만 나는 이 음악극이 어떻게 대상을 받았는지 솔직히 납득할 수 없다. 어디선가 본듯한 내용의 전개. 어설픈 설정, 음악극이니 음악이 좋았을수 있지만 정동극장에서 음악감독이 누군지 모르겠으나 오늘만큼은 완전 개판이었다.(이건 후술)
도데체 네불라의 무슨 일대기를 어떻게 찍었다는거지? 저 사진작가(가짜라기보단 아마추어?)는 도데체 뭘 찍고 있는거고 네불라가 주저리 주저리 과거를 얘기할때 옆에서 얼굴을 찍으란 소린지 아니면 계속 과거를 이야기해주면서 연기를 하고 있었던건지.. 다시 생각해도 우낀 설정이다. 수아(사진작가)가 차라리 사진이 아닌 글 작가라면 물흐르듯 자연스러웠을테고 한 인물의 전기를 정리한다고 하면 말도안되는 사진작가보단 어울리는 설정 아닌가?
마지막에 무엇인가 잔뜩 찍었다곤 하지만 뭘 찍었다는 건지.. 네불라는 그걸 보며 상념에 잠기는건 또 뭔지 하여튼 무엇인가 우끼다. 관객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만 옹기종기모여 비밀이야기를 하고 있는거 같다.
생뚱맞게 수아의 어린 과거는 또 무엇일까? 도데체 이 사람은 왜 속물이란거지? 동료를 이용해서 진급하려 했다는거? 당장 먹고 살기 어려우면 무엇이든 못할까? 작가가 부유하게 자라왔나? 그래서 이해를 못하는건가?
아무튼 자신이 동생을 제대로 못 돌봐서 동생이 다친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그것도 맞지 않다. 동생이 크게 다친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동생을 구하려다가 자신이 다쳤지만 아빠는 알아봐주지않아 마음의 상처만 깊어질뿐..
뭐 그냥 내용이 이러하다..
네불라의 일대기도 어떤 영화에선가 본듯한 아류작 같고 수아의 과거도 어디선가 본듯한 아유작 같은것들을 섞어놨을뿐 작품에는 어디에도 신선하다거나 창의적이거나 사회문제를 꼬집는다거나 인간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본다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다만 메인 주제일수도 있고 현재 한국사회에서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친일매국노 세력을 옹호하는 일부 종교단체와 그 무리들을 보면 저들의 잘못이 보이지만 자신이 살아온 시간 속에 섞여있기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리속에서 나오지 못하는 현 실태를 보는듯 해서 착잡함이 좀 들긴 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규모나 정도의 차이일뿐 조금씩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연결된 부조리와 모순된 자아를 볼 수 있다. 누구에게나...
그리고 시작하자마자 이러한 흐름이 지속되니 급격히 졸려오는게 무려 한시간이나 지속된다. 왜 였을까? 잠도 충분히 널널하게 자고와서 졸음이 오기엔 어려웠던 상황인데
추측컨데 그 중 한가지는 음향 아~ 정말 다시 생각해도 개그지같은 음향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일단 배우들의 마이크는 왜 그렇게 크게 해놨는지 규모가 대극장만하지 않은 정동극장에서 목소리만 커도 마이크 없이 공연이 가능할정도지만 배우들의 목도 생각해서 마이크 착용하는건 좋은 선택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목소리 밸런스가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었다. 그냥 소리가 크다. 그래서 무대 좌우로 왔다갔다 할때 위치감이 전혀 없다. 대형 극장, 대형 음악극을 볼때 이런 현상이 심해서 좀 거슬려하는편인데 이런 중형 극장에서 이런것을 느낄줄이야.. 배우가 말을 하는데 배우 입이 아닌 스피커에서 다른 사람이 대사하는듯한 느낌마져 드는 개판 설정이다.
그리고 음악 사운드는 또 왜 그렇게 볼륨을 처올려놨는지 내가 거의 뒷쪽에 앉았음에도 귀가 아플지경이다. 나이를 먹고 있어서 점점 난청이 올법한 시기임에도 소음으로 다가올정도면 도데체 젊은 이들은 어떻게 받아드렸을까? 음향감독은 싸이의 훔뻑쇼가 부러웠던것이냐? 아니면 귀머거리더냐.. 음향 밸런스는 또 얼마나 개판인지 명색이 음악극(뮤지컬)인데 음악 가사가 거의 안들릴정도로 음향설정이 억망이다. (음향지식이 좀 부족하면 서울국립극장 음향팀에게 지원요청을 좀 해라.. 그곳만큼 좋은곳도 드믈더라)
이러니 절반 이상을 하품만 하지.. 배우들은 목 터져라 노래부르지만 관객 그누구도 노래가 끝났다고 박수치는 사람 하나 없다. 감동을 받을수 없게 만들어놨으니 박수를 칠수가 있나..
오늘은 무척 특이한 경험도 한거 같다. 배우들 여럿이 군복같은것을 입고 뭐라 뭐라 노래부르며 스팟 조명을 받는데 스팟이 배우들 뒷쪽에서 쏘는 통에 배우들은 후광을 받은 효과를 볼 수 있지만 관객석까지 각도가 잡혀있어서 좀 앞쪽에 앉아있는 관객들은 갑자기 눈뽕에 당황스러워한다. 이들에겐 환불해줘야 하지않나? 최소한 가장 값 싼 요금을 적용하고 나머지는 돌려줘야 하는거 아닌가?
내가 수많은 연극을 봐왔지만 관객에게 직접 스팟을 그것도 머리 위에서 아래로가 아닌 정면(역광?)에서 쏘는건 처음 봤다. 이러면 가뜩이나 전체적으로 어두운 공간에서 관객들은 순간 홍체가 확장하며 눈 통증이 발생할 수 있다. 제법 위험할수도 있는것인데 조명감독은 장님인가? 또라인가? 사이코패스인가? 정동극장 생김세때문이고? 내가 이곳을 적지않게 왔음에도 이런적은 없었다.
그리고 막판 네불라의 성찰같은 장면에 뒷쪽에서 노을같은것을 연출하고 싶었나본데 누런 텅스텐 조명을 관객석에 직선으로 쏴댄다. 도데체 화이트 아웃이 몇번째냐..
사진작가 컨셉은 그러려니 하지만 왜 실제 크세논관 플래시를 터트리냐.. 미친거냐? 플래시를 터뜨릴려면 관객석과 정반대 방향으로 터뜨리던가. 아~~ 한숨이 나온다.
이렇게 개판이라도 관객이 만석이라 신경안쓰는것인가? 이딴게 만석이라니.. 이딴 음악극에 기립박수를 친다고? 노래가 끝나도 박수 한번 안치던 사람들이? 미리 짠것인지 앞자리 한 무더기 사람들이 우루루 일어나더니 다른 사람들도 슬금슬금 일어난다.
조명을 관객석에 쏘질 않나 소리는 너무 커서 뒷좌석에도 소음으로 들리질 않나 내용은 어디서 본듯하고
신기하다. 자기들이 홍보한다고 SNS에 사진을 잔뜩 올려놓고 관객들보곤 커튼콜때도 사진 찍지 말란다. 뭘까? 무엇이 찔리는걸까? 컨튼콜 사진을 못찍게 하는것은 웬만하면 보지않는게 좋다. 그림전시회도 사진못찍게 하는것일수록 가짜그림이 대다수에 그마져도 볼게 없는 전시회들이다. 남들과 다른 정책을 내세운것들은 무엇인가 켕기는게 있다는것이니 내용도 별로일경우가 많다.
최소한 음향이라도 개선되면 그때 보시길 권함.. 지금은 관객들 난청올수 있음 특히 나이가 적을수록 귀 건강에 안좋고 앞자리는 가급적 앉지 마시길.. 조명을 그지같이 설정해서 눈건강에 치명적일수 있음 웬만하면 카메라 플래시는 좀 쓰지말거나 무대쪽을 향하자. 관객들 눈 아프다.
이제 마이크도 좋고 음향시스템이 미치게 좋은 세상인데 벨칸토는 좀 버리면 안되나? 음악극 창법으로 쓰기엔 지금 시대와 안맞는걸 못 느끼나? 옛날작품도 아니고 명색이 21세기 최신작인데 아직도 이런 곰팡내나는 삼백년전 창법으로 작사작곡을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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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동국은 무죽페스티벌도 좋고 지금 하고 있는 연출가전도 좋은거 같다. 이곳은 관객석 의자가 좀 후져서(앞뒤 좁고 자세가 조금 불편해서 다리 아픔) 그렇지 전반적으로 공연하는 연극들의 품질은 고민안하고 선택해도 될정도로 엄선된 것들만 올리는거 같다.
오늘 연극은 3명의 출연자들이 각기 다른 현재의 자신이 되도록 한 과거들의 사건들을 소개하고 그것을 이겨내고 있다는 일종의 3편의 옴니버스형식의 성장드라마 구조같이 진행된다.
셋은 서로 동무(친구보다 동무가 친근해보이고 국민학교시절만 해도 책에 동무라고 나옴)같은데 영화? 연극? 어떤 형식의 모임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서로 동무관계는 확실한거 같다.
모두 실명으로 나오는데 내용은 각각의 실제 과거 이야기인지 창작물인지 모르겠다만 흔하면서도 특이한 그런 과거를 지닌다.
우리 인간이 어느정도 성숙되었을때의 사고형태가 생각보단 모두 다르듯 이것은 자라온 환경에 따른 후천적 영향이 대단히 중요하기때문이다. 물론 선천적 성향도 있지만 그것들을 거부하게 만드는것이 현실의 왜곡된 시선들이 아니었을까..
기억의 장속에 넣어두는 세월의 흔적들, 특히 몸에 걸치는 의상류들이 주된 소재이나 엄밀히 따지만 이 소재들은 거의 의미 없어보인다. 그리고 잘 맞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특히 고현우의 아기때 입은 배냇저고리는 너무 오버 아닌가? 그 시절이 기억나는것도 아닌데 사랑에 목매면서 배냇저고리 냄새를 맡다니.. 이정도면 변태적 성향으로 변질될 우려가 커보인다. 잘못 생각하면 소아성애자 취급을 받을수도 있는 조금은 너무 간듯한 전개이다. 다만 이것은 줄거리를 이어가기 위한 소품정도에 불과하니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김주은의 하얀색 드레스도 그런데 하얀색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이것이 깨끗해서가 아니라 자칫 잘못된 색을 입히면 돌이킬 수 없기때문이다. 그래서 조심히 가장 어울리는 색을 입히기 위해 신중 또 신중히 고려한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 혹은 타인의 방해로 원하지 않는 색이 입혀지면 평생을 이색때문에 시달린다. 여기서 말하는 잘못 된 색은 바로 주변의 잘못된 인식과 주입 그런것때문에 때묻지 않은 아이가 고통이란것을 알게 되고 괴로워 하며 그것을 이겨내고자 수많은 노력들을 하지만 모두 그것을 이겨내는것은 결코 아니다. 연극에서는 자신을 괴롭히던 과거를 회피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으로 마무리 되지만 이것 역시 쉽지 않다. 사람들 대부분, 어쩌면 모두 아이일때의 상처로 인해 평생동안 행동의 제약(강박) 한두개쯤은 가지고 있을것이다. 깊게 새겨진 이 죄의식을 흰색으로 깨끗히 되돌린 사람이 있을까? 기껏해야 외면하는것정도로 마무리 될뿐이다.
고현우와 장채원은 뭔가 조금은 과장된? 혹은 좀 쌔고 소설속에나 있을법한 내용들을 다룬다. 장채원은 가정폭력. 그래서 어머니, 딸(장채원), 오빠가 함께 가출을 했는데 어머니와 오빠의 잦은 싸움으로 어머니와 오빠가 집을 떠난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장채원 아이일때 아버지의 폭력으로 오빠와 딸의 사이가 유독 돈독했었는데 장채원만 혼자 남겨놓고 떠난다? 그것도 엄마와 오빠 둘 모두가? 이게 사실이라면 너무 슬픈 과거겠지만 발생하기 어려운일같이 보인다. (부모의 폭행으로 가출까지는 어느정도 가능한데 이후 아무런 기약도 없이 모두 흩어진다? 이 설정이 좀)
그리고 고현우는 비만에 대한 것인데 소아비만은 세포수가 많아진 비만이라 살을 빼는게 대단히 어렵다고한다. 대부분 성인이 된 후에 비만이 되면 세포자체가 커지는 것이라 식이요법으로 빼면 효과가 좋은데 세포수 자체가 많은 소아비만은 애초에 이 수를 줄이지 않으면 좀처럼 다이어트 효과가 덜하다고 한다. 이 사람은 소아비만에 해당되지만 일단 한국은 온갖 전쟁이 빈번했던 1800~1900년대는 빈곤함은 기본으로 달고 살았기때문에 아기들이 통통을 넘어 퉁퉁한것이 복인냥 서로들 칭찬하기 일색이다. 나 또한 아기일때 몸이 컸는데 동내 사람들이 엄청 좋아했다고 한다. 고현우도 아이일때 이러한 칭찬을 늘 받고 자랐기때문에 자신의 몸이 커지는것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없다가 몸이 커져서 불편해질 무렵부턴 무엇인가 잘못된것을 느낀다. 여기까지는 그럴수 있다손 치더라도 아버지가 목욕탕을 같이 가는게 챵피하다고 했다니.. 이부분에서 솔직히 기분이 완전히 망쳤다고 할까? 사람의 자존감을 가장 많이 뭉게는 사람이 부모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남들 앞에 보이기 챵피하다고 부모가 자식에게 말한다고? 자식이 부모를 챵피해 하는 경우는 있어도 반대의 경우는 결코 없다는게 부모자식의 운명같은 관계인데.. 물론 나의 부모를 생각하면 완전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닌거 같지만 그럼에도 자식에게 그런말을 할수가 있을까?
김주은과 고현우는 사회의 잘못된 시선, 장채원은 가정폭력 이 모든 과거를 씻으려고 이들은 노력한다. 뭐 그런 성장드라마다. 내용이 좀 와닿지 않고(모두 사실이라도 내용을 순화하거나 관객이 받아드릴수 있는 정도의 각색은 좀) 75분 연극임에도 리듬이 툭!툭! 끊기는 흐름은 왜 그런지.. 배우들의 서로 연계는 좋던데 전체 스토리 전개에서 설정 변경시에 리듬과 호흡이 모두 끊겨서 재미 있으면서도 답답하고 지루함이 있다. 한사람당 25분정도로 짧게 자신의 스토리를 이야기하니 웬만하면 넘어갈텐데 이 짧은 단락에도 리듬이 끊기고 호흡이 정지되니 75분도 기~일~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곳이 가끔식 생기니 프로젝터 영상이나 텍스트는 좀 줄이고 적어도 텍스트는 배우들이 각각 상황에 맞게 읊으며 넘어가도 되는것을 왜 정지시키는 건지.. 여운의 시간이 너무 길면 감동은 사라지고 하품이 찾아오는 전형을 보여주는거 같다.
각 배우들의 과거 디테일을 좀더 살리면 2시간도 지루할 틈이 없을 좋은 작품인데 설정이 좀 아쉽고 극장 관객석이 후진것에 다시한번 아쉬웠다.
그렇다고 관객이 열명도 안될만큼 이상한 연극은 아니었는데.. 이정도면 이정도 규모의 소극장엔 거의 만석에 가깝게 관객이 있어도 될 연극인데 날이 너무 더워서였는지 적은 관객수는 좀 안타까움이 드는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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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적인 연극 두편이 연이어 공연하는 단막극제로 한편에 대략 30분정도? 짧다. 이렇게 짧을땐 강렬함을 주기 훨씬 좋다. 자극적이고 냉소적이며 냉철한 비수와같은 아무래도 특정 포인트만 후벼파다가 끝나면 되기때문일텐데..(공연시간이 길어지면 이 피날래를 위해 빌드업해야 할것들이 엄청 많고 제대로 안되면 망하기 일수라서 길면서 재미있게 만든다는것은 무척 어려움)
첫번째 극의 제목은 '시계태엽' 제목에서 반복의 일상이 그려진다. 이건 비단 현대인만의 일은 아니었을것이다. 농부, 어부, 교사, 학자, 엔지니어 등 어딘가에 적을 두고 있는 상태라면 다람쥐 쳇바퀴 인생을 벗어날 수 있을까? 지구 전역 어디가 다를까? 복지가 잘되 있다는 북유럽은 다를까? 똥구멍이 찢어게 가난한 어떤 나라는 다를까?
이것을 벗어난다는 것. 다른의미로 죽음을 의미할수도 있다. 아니 죽음을 각오한 이탈일것이다. 하지만 점차 생활 수준이 올라가면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쳇바퀴에서 벗어난다.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한번쯤은 벗어나거나 벗어나길 꿈꾼다.
이런 사람이 전지구의 99%는 되겠지. 나머지 1%는 실버스푼이 아닐까?
연극에서 청소부(최임경)는 어떤 존재일까? 처음엔 신인가? 아니면 악마인가? 아니면 자신의 또다른(반항심이 많은) 자아였을까? 아무튼 이 청소부는 회사원(박준일)에게 또다른 생각을 넣어준다. 이 반복된 삶은 삶일까? 톱니바퀴에게도 인생이란게 존재하는가.
기성세대(이윤상)는 시스템을 거부하려 들때 여지없이 권력으로 짓누른다. 돌아가는 시계를 거부하려하면 관성(사회시스템)으로 탄압하고 겁박한다. 이때 대다수는 자신의 처지에서 안식을 찾으려고 다시 고요해지는데 인간이 호랑이같이 혼자 사는 동물이었다면 어땠을까? 지금같이 발전하진 못했겠지만 호랑이는 자유롭게 자신의 꿈을 지키고 있는것인가?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인간에게 쳇바퀴라는 망상을 씌어놓은것은 인간사회가 그것을 만들어서가 아니라 독립된 인간에세 사색할 시간이 주어졌기때문은 아닐까 이것은 부속의 일부를 벗어나서 또 다른 시스템을 개척하고 그 시스템에 많은 사람들이 종속되어져 같은 고민을 하다가 또 다시 벗어나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고 만들어 무한히 확장하고 있는 인간사회. 거시적으로 보면 무엇인가 반복되는 플랙탈같은 세상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신만이 이러한 반복을 볼 수 있겠지.
이 시간을 확대하고 확대하고 확대해서 보면 나라는 개인의 쳇바퀴가 나올뿐이다. 벗어나서 다른길을 만들어볼까? 내 길이 옳던 그렇지 않던..
연극에선 결국 시스템에 순응한다. 만명중 구천구백구십구명은 순응할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으면 시스템이라 할 수 없을것이다.
다만 좀 추상적으로 묘사되기때문에 짧은 연극치곤 약간은 지루함이 있다고 해야 할지.. 그래도 역시 시간이 깡패라고 하품이 나올만 할때 끝나버린다. 주제가 식상하기도 하고 표현이나 전개가 그다지 신선하지도 않고 젋은 회사원 배우는 왜 그렇게 땀을 많이 흘리는지.. 공연할땐 데오드란트라도 얼굴에 뿌려야 하는게 아닌가?싶을정도로 많이 흘리던데
관객에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곱씹도록 여윤의 시간이 좀 섞여있었으면 좋았을건데 너무 급하게 진행되고 마무리되는게 조금은 섭섭했다.
두번째 극은 '엉겅퀴 꽃밭에서' 라는 연극인데 내가 엉겅퀴를 잘 모른다. 그래서 보는 내내 가시가 있는 덩굴식물인줄 알았다. 한국 산에 흔한 환삼덩굴 식물같이 가시가 잔뜩 있는 뭐 그런.. 그런데 집에와서 찾아보니 민들레과 한해살이 일반적인 식물이다. 물론 털같이 촘촘한 가시들이 많이 있지만 민들레같은 풀이고 확상성도 그다지 높은거 같지도 않다.(들판에 보면 민들레 천지지만 엉겅퀴는 거의 안보임)
아무튼 뭔가 소제 선택이 좀 이상하게 느껴지는 연극이다. 이 연극을 뭐라고 해야 할까? 초반에 갑자기 노래 '이히 리베 디히'를 부르며 등장하는데 이게 주제곡인가 싶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렇지도 않은거 같은데 사랑을 이야기 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도 그러니 어느정도 맞는거 같기도 하고
지금에와서 생각해보니 도통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 갑자기 개미(안호주)가 아버지를 찾아가겠다고 하는데 개미세계에서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미 후 바로 죽기때문이다. 이후 어미개미(여왕개미)는 그 정자를 뱃속에 보관하면서 계속 알을 낳기때문이다. 아무튼 아버지를 찾겠다니. 여기서 등장한 등가교환같은 상황. 무엇을 얻고자하면 무엇인가를 내놓아야 한다. 이 세계에선 일반적으로 노력하기 위한 시간정도를 말한다. 물론 이 시간은 곧 죽음일수 있다. '시계태엽'에서 보여준 이탈의 결과와 비슷하게 이어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나무토막이 지네(김태라)를 덮친다. 인간이 지네를 죽이려고 그런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네는 꼼짝 못하게 됬고 개미에게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개미가 도와주기엔 역부족이고 지네는 끊임없이 자신을 살려달라고 꼬신다. 조금 납득이 안되는것은 무슨 마법사도 아니고 지네의 능력(살상능력?)을 주겠다며 자신을 살려달라는데 어떻게 주는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끊임없이 맞교환을 이야기 하지만 개미는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왜 였을까? 이 부분에서 조금 이해하긴 어려웠다. 하루정도 투자하면 지네를 살려줄수 있고 그러면 나에게 제법 유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난다는데. 내게 필요없는 것은 갖을 필요없다는 철학적인 이유가 녹아있는것인지 오만인지 뭔지 역시 좀 어렵게 다가오지만 지루함이 느껴지진 않는다.
그리고 나온(지네보다 먼저나왔나? 헷갈림) 나비(금수현). 나비가 나풀나풀 날아다니는것이 정신산만하긴 한데 이 나비는 입이 정신사납다. ^_^;; 무엇인가 계속 이야기하는데 도통 들어오질 않는다. 그래서 지금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없다. 아~ 이러면 안되는데...
마지막 등장은 오묘하다. 지렁이(문상원)와 달팽이(한동현)가 나온다. 지렁이가 죽으려고 태어난곳인지 행복했던 곳인지 어딘가로 가겠다는데 달팽이는 살려고 가는거라고 하는거 같긴 하지만 죽으러 간다는건지 살려고 간다는 건지 아무튼 도인들도 아니고 선문답을 하고 있다. 어렵지 않은 내용이지만 감동같은게 있었으면 가슴에 남는 말 한마디정도 있을텐데 없다.
두번째 연극은 짧은 시간에 너무 훅훅 지나가는 통에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기억에 안남는것은 내가 더위를 먹었거나 연극에서 보여주려던 어떤 주제의식이 부재했거나일텐데 아무래도 내가 더위먹은게 아닌가 싶다.
두번째 극만 좀 늘려서 한편으로 만들면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연극이다. 아마도 이런 템포로 두어시간 연극을 만들려면 배우들이 대사에 깔려서 살려달라고 하겠지만 ^^
볼땐 볼만했는데. 왜 기억에 남질 못한걸까? 오늘 너무 더웠나? 비오고 해뜨고 바람불고 지랄맞긴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