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공연2023. 4. 17.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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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청쪽 극장인 정동세실극장을 가는데 서울시립미술관이나 국립현대미술관을
가지 않는것도 참 오랜만이다. 오래도록 매주 구입했던 복권도 까먹어 구입못한걸 봐서는
요 며칠간은 정신줄을 놓고 있는거 같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해야겠지만 한편으론 찝찝

창극? 음악극(뮤지컬, 오페라류같이 벨칸토 창법으로 하는 류)들중 판소리로 하는것이라서
한국사람들의 접근성 만큼은 좋겠다란 막연한 생각을 했지만 이건 나중에 말해보도록 하고
일단 흥보가는 몰라도 흥보이야기를 모르는 한국사람은 극히 드믈기때문에 내용측면에서도 그렇고
현대에 맞게 살을 붙여서 이해하기 쉽고 편하게 관람이 가능하다는 큰 잇점이 있다.

전통이란게 문헌으로만 넘어오는게 아니라 생활 곳곳에 섞여 자신도 모르게 습득 되는 수많은 것들이니
제비다리 고쳐서 박씨 물고와 은혜를 갚고 대충 형동생 사이좋게 지냈다는 해피엔딩의 이야기쯤은
아이때부터 봐왔던 것들로 사회문화 전반적으로 깊숙히 자리잡고 있으니 어떻게 각색을 해도 문제되지 않지만
너무 흔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놓냐에 따라서 익숙함에서 오는 지독한 지루함이 올 수도 있다.

이 연극은 이것을 적당히 풀어내는거 같긴 하다.
다른 판소리의 대목을 따와 알맞게 각색도하고..(십장가 대목은 춘향가의 슬픈 상황이 떠올라서 더 슬프다.)
제비 노정기도 멋지게 잘 표현한다. 하지만 무슨 소린지는 그들과 전공자들만 알겠지..

그런데 흥보 마누라의 이름이 '강옥진'이라고 나온다!? 이게 무슨 말이지
물론 흥보는 이름인데 마누라는 이름이 없이 등장한다. 놀부 역시 놀부 마누라라고 나올뿐이다.
흥보가에서 흥보마누라의 비중이 크지 않고 주된 내용은 형제간의 문제라서 자식들도 이름없이 나온다.
놀부 마누라 역시 주걱으로 뺨을 때리는 충격적인 역할이 있지만 역시 이름이 없다.

엄밀히 따져서 흥보가 전체에서 놀부와 흥보 말고는 이름이 없다. 누구 씨 또는 직책 정도일뿐

그런데 이 극에서는 마누라의 비중이 대단히 높기때문인지 이름을 공개하고 만다. 이때부터 무엇인가 트러지는데
후반부 모든 판결이 된 이후 약간의 시간동안 이름도 없이 살아온 서러움을 표출하며 이름을 계속 말하지만
이전까지의 모든 감동이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모든것이 퇴색되버려 잊혀지는 느낌이다.

요즘 한창 말 많은 '흑인 인어공주' 같이 불필요한것을 우겨넣은 느낌으로 모든 흥을 깨버린다.
차라리 이러한 서러움을 넣고 싶었다면 처음 재판장에게 '나의 이름은 흥보 마누라가 아니라 강옥진이니 강옥진으로 불러달라'라고
선포하고 그로인한 모든 부당한 대우를 현대적 시각으로 녹여내어 흥보를 압박하던가..
모든 판결과 결말이 다 끝나고 숨을 고르려는 찰라에 갑자기 "나의 이름은 강옥진~~~!"이러면 응??????

여건 신장운동 연극을 보러온건 아닌데

이걸로 10분정도를 지리하게 이어간다. 이전까지 강옥진(흥보 마누라)씨가 주장한 것들은 어느정도 수용가능하고
자식이 수십명이라거나 외도해서 낳은 자식이라거나 제비는 강옥진씨의 은혜를 갚기위함이었다거나 등의 것들은
연극에서 허용되는 왜곡 또는 각색 정도로 감안하고 충분히 수용하며 즐길수 있지만
모든 흥보가의 내용을 버리고 여권운동만을 남겨두면 연극 제목 자체가 '흥보 마누라 이혼소송 사건'이라고 붙이면 안되고
'강옥진의 여권 신장 운동' 이라 해야 된다.
이건 본질 자체가 뒤집어지는 것으로 애초에 흥보가에 붙여서는 안되는 내용으로 사회 풍자, 저항, 항의, 투쟁을 하고자 하면
독립된 내용으로 흥보가는 일부분만 차(인)용하는 수준으로 전개되어야 하지만 소설인 흥보가를 붙여봐야 아무런 설득력을 지니지
못할테니 이마져도 쉽사리 붙이기 어려워 진다. 그런데 이 연극은 모든 흐름을 무시하고 이 대목을 과감하게 붙여버렸다.

여성의 이름대신 성만 말한다거나 모아무개의 마누라 라는 표현을 거의 쓰지 않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도 맞지 않는 이런 황당한
상황을 붙인것은 흥보가 등 모든 판소리의 등장인물에 이름을 붙이겠다는 의지일까

너무 어이없는 끝부분때문에 멍해진 지저분한 느낌은 지금까지도 지워지질 않는다.

그리고 모든 배우들이 젊은 분들이라 발음이 확실히 좋지만 사용하는 문장들, 특히 창의 문장들은
현대어가 아닌것들도 있기때문에 알아듣기 어렵지만 역시나 자막이 없다.
고증한다고 뒤쪽 벽에 대사를 표기해주며 그것을 창으로 선보이니
가사를 모두 보고 들을수 있어서 한결 좋지만 그 외 것들은 전혀 자막이 없다.

판소리 처럼 소리꾼이 임의로 붙이고 빼는것도 아닌데 자막좀 넣어주면 안되는 것일까
기왕이면 외국사람들을 위해서 외국어도 좀 넣어주면 더 좋겠지만 이러한 배려는 없다.

그리고 옆에서 악기로 극에 필요한 음악을 실제로 연주하기때문에 극과 음악의 합이 좋긴 한데
음악소리가 너무 커서 배우들의 대사 전달에 상당히 방해가 된다.
연극을 보러 왔는데 음악소리때문에 대사가 잘 안들리면 문제가 아니겠나.
(모든 내용을 다 외우고 있는 사람들이 모니터링 하면 이런 밸런스 문제가 발생함)

작자 미상인 흥보가에서 마누라 이름이 없어서 마누라가 서럽다고는 할 수 있는데
강옥진이란 이름은 실제 근거가 있는 이름인지, 도데체 어디서 나온 이름인지..
대충 지어낸 이름이면 오히려 전통문화를 죽이는 개짓일텐데(찾아봐도 마땅히 나오는 곳도 없고)
아무튼 이부분은 내용 전체에 녹여내는 것으로 재조정되기를 기대하며 다시 볼수 있길 바라본다.

이런 극은 혼자보는것보단 여럿이 모여 보면 좋을텐데
다음에 또 하면 식구들이나 친구들을 좀 모아볼까 ^_^

출연 : 김율희, 한진수, 전태원, 이재현, 김보람

Posted by 시세상
연극.공연2023. 4. 12.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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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똔체홉 작품은 이 극장에서 저렴하고 안락하게 항상 관람할 수 있다.
이렇게 한 작자의 이름을 걸고 그 사람의 희곡을 주로 공연한다는건 관객입장에선
한 작가의 작품을 계속 보고 싶을때 큰 위력을 발휘한다.
물론 이 극장에서 한 사람의 작품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전에도 그런거 같기도 하고 아닌거 같기도 하고 관객석 앞 무대가 하얀막으로 닫혀있다.
협소한 무대를 보여주기 창피했던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앉아있으면 답답한 기분이 들어
눈을 감고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내 다리가 짧아진걸까 의자가 무척 높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크고 쿠션좋은 의자지만 자세가 무척 불편했다. 전에는 안그랬던거 같은데 뭐가 바뀐걸까
여전이 안깨끗해보이는 폭신한 의자 

영화 '시라노 연예 조작단'인가?가 떠오른다. 그 영화도 제목은 이 작품에서 따왔다고 하고
대충 일부분 비슷한 내용 스럽기도 하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런 내용의 연극 영화는 널려있다. 고백할 수 없어서 죽쒀서 남주는 그런 내용

그런데 17세기 여자들의 위상은 형편없었을텐데.. 백작(드기슈)이 그렇게 예의바를수 있을까?
(과거 서양의 여자 위상은 대부분이 일종의 소유물로 취급받았었기때문에 20세기초 서양에서 여권신장운동이 퍼진건데)

힘과 돈이 있는 백작이라면 강제라도 취하려 했을텐데..

아무튼 시라노는 자신의 외모에 대한 심각한 열등감이 있다고 나오지만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코 얘기를 한다고 칼부터 꺼내는건 시정잡배 아닌가? 흐름은 그러하지만 원작을 읽어보진 않아서
시라노의 내면을 깊게 볼수는 없다. 유쾌하게 표현하지만 조금 깊게 생각하면 정신병적 증상들이 많이 보인다.

17세기 프랑스는 그래도 됬던것인지
작가 에드몽의 강한 열등감이 작품으로 표출된거겠지만 이러한 전개는 수많은 영화에서도 봤기때문에
식상한다. 1897년에 나온 희곡이니 식상하지 않은게 이상한거지만 아무튼 신선하거나 세련됨이 보이진 않는다.

연극 전체의 분위기는 영화 아마데우스와 무척 비슷하다. (뮤지컬 아마데우스를 본적은 없음)
발성이나 표현등 많은 것들이 이 영화와 매우 흡사하고 아마데우스라는 뮤지컬도 이 극장에서 같이 공연하며
배우들이 일부 겹치기도 했기때문에 비슷하게 맞춰진건지 모르지만 아무튼 영화가 겹친다는건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다.

영화가 워낙 뛰어나게 사기 치기도 했고, 너무 재미있다보니 다른 것에서 이렇게 잘 만들어진 것의 냄새가 풍긴다는건
아류작같은 기분이 나기때문인데 영화 시라노도 시대별로 찾아놨으니 봐보면 어느것이 원조인지 알수 있을거다.
영화 아마데우스는 1984년작이고 내가 찾은 시라노는 1950년작, 1990년작, 2021년작이니..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로 협소한 극장을 커버하더라도
너무 작은 무대는 분주하게 움직일수록 소극장의 답답함이 보이는건 어쩔수 없으니
좀더 큰 무대에서(너무 크면 배우들이 잘 안보이니 대학로에 있는 것들중 좀 큰 곳)
무대장치도 좀 더 잘 만들어진곳에서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전체적으로 밝고 이상하고 납득안되고(시대적 배경같은?) 특이하지만
무척 재미있고 신나고 슬픈 2시간30분(쉬는시간포함)이 짧게 느껴지지 않는 훌륭한 연극이었다.

출연 : 조환, 염인섭, 조경미, 조희제, 신우혁, 김미리내, 최성우, 박준홍, 최장천 외 많음

Posted by 시세상
연극.공연2023. 4. 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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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청에서 혜화동까지 왕복은 무리일까
편도만 걸어도 고관절이 아파온다. 오래 걷지 못한다는건 차를 살때가 되었다는건지

지난해 1월1일에 보고 다시 보고자 했던 연극
원래는 같은 해에 다시 한다고 하길래 그때 봐야지 싶었는데 이제서야 다시 보게되었다.

바로 얼마전에 영화 안나카레리나(소피마르소, 1997년)를 봤는데
연극 속 대사를 이해하기 위해 책을 보려했지만 시간이 마땅치 않아서 영화를 본건데 적당한 시기에 봐서
내용도 머리속에 잘 들어와 연극에서 안나를 좀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작년과 무대구조나 전체 흐름의 구성은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다만 첼리스트가 작년에도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없었던거 같은데 아닌가

그리고 톨스토이와 브론스키를 완전히 분리하여 정동환 배우가 톨스토이를 전담하게 되어
예전보다 좀더 다양하게 표현되지만 좀더 복잡해져서 간결하며 절도있는 구성은 사라졌다.
한 인물을 둘로 나눠서 대화하듯 얘기하는건 때론 다중인격자 같아서 어색하기도 하고
하나의 자아로서 동화되기에도 인식의 흐름과 약간의 차이가 발생해서 불편함도 발생한다.

안나와 안나의 생각은 어느정도 보완적이지만 톨스토이는 서로 대립되다보니 더욱더 자아를 묶어내기 쉽지 않다.

그리고 정동영배우의 톤은 자꾸만 드라마 '호텔 델루나'가 떠올라서 머리속에서 드라마를 지우고 싶은 충동이 생기던데
이 드라마를 좋아하기도 하고 여러번 보기도 해서 그 이미지가 자꾸 겹쳐버려
톨스토이의 내면으로 빠져들기가 전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이분의 발성이 한결같아서 그런거 같긴 한데 배우들의 숙명이자 카르마일지도 모르겠다.

125분 연극으로 제법 길 수 있는데 그 시간이 결코 지루할 틈이 없다.
중간 인터미션을 기점으로 해서 최고조로 급격히 변화되는데 이때문에 숨고르기차원에서
쉬는 시간이 주어진거 같지만 그냥 이어졌으면 어땠을까란 생각이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그 전과의 표현양식도 제법 바뀐다. 극단적인 단조로 바뀐다고 해야 할지.
매우 거칠어지는 흐름때문에 심리적으로 무척 조심스럽고 예민해진다. 섣부르게 다가갔다간
안나의 절규에 나같은 범민은 쉽사리 갈기갈기 찢어질것이다.

전체적으로 소피마르소의 안나카레리나와 비슷한 느낌을 풍긴다. 약간은 도도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때론 오만하다. 막상 영화 안나카레리나는 2012년 작품이 더 잘 만들어졌다곤 하지만 영화속 소피의 느낌과
묘하게 겹치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연출이 영화를 많이 참조한건지 정수영 배우가 이 영화를 참고했는지 모르겠음)

톨스토이의 참회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허울을 쫓았던것이 부질없는 허상같다고 할까..
톨스토이의 참회록은 아직 보질 못했는데 대사를 곱씹어보면 공산주의 표상인 낫과 망치가 떠오른다.
종교와 노동으로부터 오는 기쁨, 순수한과 순결함, 인간사회의 평등성
안나카레리나가 50세에 나온 작품이니 인생의 회한을 느낄 시기였을까
이 연극에서는 톨스토이의 고뇌를 표현하지만 매우 표면적인 손 쉬운것들만 가볍게 다룬다.
왜 이 사람은 모든 편의를 포기하고 농부의 삶을 살려고 했던것일까란 결정적 사유가 보여지 않는다.
그래서 이 연극은 톨스토이의 참회록이라 말하면서 안나의 일대기만이 각인된다.

톨스토이가 모든것을 포기하게 된 그 무엇을 찾기 위해 기차역에서 막차를 기다렸던거 같은데 안나를 이용해서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안나는 사랑을 위해 모든것을 던져버리고 마지막 기차를 종착역으로 맞이하였는데..

연극 전체가 고풍스러우면서 기품있는 고급스러움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안나의 죽음은 좀 더 연극적이면서 절망과 희망이 양립하도록 구성되었으면 좋겠는데 두번째 봐도 어색하다.
그리고 톨스토이의 사유가 보고 싶다. 내년에 또 볼수 있으려나.

올해는 작년과 조금 다르던데 내년엔 올해보다 조금 더 달라지길 기대해본다.

출연 : 정동환, 정수정, 주영호, 박채희, 강정민, 안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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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