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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어 두주째 목요일에 회사에서 두시간 거리에 있는 국립국악원을 찾았다. 이곳이 이렇게 멀었다는것을 20여년동안 몰랐으니(20여년동은 근처에 살았음) 올적마다 다음엔 평일엔 오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지만 막상 공연을 보면 다음엔 뭐가 하나 찾게되니 이 뫼비우스 띠같은 윤회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런지.
예악당에 이런 좌석이 있는지 몰랐다. 나와 내 뒷자리 높이 차가 급격히 커서 뒷 사람이 발을 꼬고 있으면 그 발이 내 머리 옆에 온다는것이다. 왜 이렇게 개그지같이 설계한거지? 병신같이 설계한 새끼는 어디선가 잘먹고 잘 살고 있을텐데 이렇게 구분되어있는 구간이 1층에만 몇줄이나 된다. 예약당에선 이딴거 신경 안쓰겠지.. 개놈들
좌석 예매할땐 중간 자리를 잘 선택하지 않으면 뒷사람의 발이 내 얼굴 옆에 있을수 있다. 다시 생각해도 개같은 구조다. 최소한 칸 막이라도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이번엔 굿들만 4가지가 엮여 있다. 전통의 재발견에서 전통이란게 굿만 있는것을 분명 아닐진데 예전 '꽃신 신고 훨훨'같이 망자를 기리는 공연이라면 충분이 이해되지만 물론 굿이란게 망자만을 위한 문화도 아니고 잘되길 기원하는 당시 백성들의 애환이 담겨있는것이긴 한데 그럼에도 제목과는 사뭇 다른 기분이 든다. (홈페이지에 설명은 되어 있었음. 내가 안봤을뿐임)
난 아직도 국악 관현악단의 존재를 느낄만한 공연을 본적은 없다. 오늘 역시 '그다지'라는 기분이었다. 이유는 아무래도 네개의 굿이 나오는데 한국의 굿 문화에서 등장하는 악기라고 해봐야 태평소, 꽹과리, 북, 징 정도 아닌가? 그런데 관현악단이라니.. 완전하게 각색된것도 아니고 그냥 예전에 있던 그것에 관현악을 덧붙여놨다? 이것을 국악오케로 편곡했다곤 하는데 국내악기 특색에 맞는 편집이었나?라는 것은 나같은 초짜 입장에선 그다지란 말밖엔 달리 떠오르는 생각이 없다.
일단 겹칠때 소란스럽고 창자가 굿을 하는데 국악현악단이 합치기 시작하면 창자의 말이 전혀 안들린다. 이게 어느정도냐면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공연을 하면 술취한 노인이 나와서 흐느적거리는거 같은 전혀 안섞인 이상 두 부류가 따로 존재하는거 같다.
서양에서 악기 협주곡은 솔로일땐 철저하게 그사람을 돋보이게 관현악은 바닥에 스스로 깔릴뿐이다. 그리고 합주일땐 구성으로 흡수되어 전체에 음악의 흐트러짐이 없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번 공연들은 오케와 섞이기만 하면 다 흐트러진다. 오케의 멜로디가 올라오는것도 아니고 창자의 구슬푼 노랫가락(굿)이 올라오는것도 아니다. 결국 산만하기만 한 소음과 같은 경우도 적지 않다. 왜 일까? 우리도 궁중음악으로 분명히 합주란것을 해왔고 편성도 대규모로 전체적으로 조화도 이루었는데.. 아직은 노랫가락과 합치는것이 어색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판소리 다섯바탕이라고 해봐야 북 말곤 없지 않은가. 민요에 들어가는 악기라고 해봐야 장구, 쾡과리, 징, 태평소, 피리 같은것뿐 아닌가
현악기에 포함된것은 시조같은 묘한 음율의 세계였고 그마저도 지금 그 음율을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런와중에 대편성으로 콘체르토를 하겠다니.. 하지만 계속 시도되야 한다. 서양 음악중 지금껏 남아있는 이유도 지금의 열배, 백배 이상이 나왔기때문에 그중에 옥이 살아남은것 아니겠는가. 그 중에 사라남는것들. 그것들이 판소리 다섯바탕이고 민요고 그러겠지. 한백년 지나면 이중에 유명한것들이 남아서 세기의 명곡 반열에 오르지 않겠는가.
그래도 명색이 전문가들이니 조금은 조화, 벨런스 화음에 신경써주길 기대해본다.
예악단의 개같이 단차가 심한 의자 배열을 좀 바꿔라. 어떤 놈이 머리통 옆에 뒷사람 발을 보고 싶겠냐. 개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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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춤이 언제 만들어진거지? 오래된것인지 근래에 만들어진것인지 그리고 어떤 뚜렷한 줄거리가 있는 내용인데 이런건 단순히 춤이라 하면 되는건가 그냥 춤(무용)공연이라 하면 되는건지 그러기엔 너무 두리뭉실한거 같고 범위가 너무 넓은데
단테신곡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죽음에 대한 세계를 묘사한다곤 하지만 이런 글을 보지 않고 보면 '아~ 저승을 그리고 있군'이라고 알 수 있는건가 나는 춤으로 나타내는것중엔 그나마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그리움, 사랑, 환희, 분노.. 뭐 이런 비교적 단순한 표현들정도나 알수 있는정도지 이게 어떤 공간, 배경, 변화.. 등 그들이 말하는 수많은 의미를 구분하진 못한다.
음악도 어떤 감정의 흐름정도나 간접적으로 느낄뿐 영화같은것에서 보면 서로 연주로 대화한다거나 하는 그런 허무맹랑한 경지에 오른적도 없으니 그 깊이가 매우 얕다고 할 수 있다.
이번 공연 환생을 소개한 팜플렛을 보고나서야 그렇구나 할뿐이었다. 그런데 조금전 팜플렛을 보면 무척 놀란것이 있는데 각 무용수들의 배역의 이름들이 있었다는것이다. 사택왕후, 선화공주, 무왕, 지명법사, 수문장 백제때의 이야기인가? 누가 사택왕후고 누가 선화공주지? 전체적인 줄거리가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것일까?
단테의 신곡은 사후의 세계, 속칭 저승에 대해 이야기 하니 이것 역시 그런거 같다. 그런데 옛 이야기의 후속, 그래서 외전이라 붙인것인가? 그 후의 이야기 처럼 그러면 단테의 신곡이 아니라 불교적 사상이 훨씬 깊은거 아닌가? 전체적인 느낌도 윤회에 가깝게 흘러가던데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깔고 가는지 그에 관련한 무엇이 있으면 좋을거 같지만 전혀 부연설명이 없다. 춤이란게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공연예술의 한 장르겠으나 이야기를 붙여놨다면 나같이 이해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개략적이지만 조금은 상세한 줄거리를 알려주는건 어땠을까싶다. (공연중 알려달라는게 아니고 팜플렛 혹은 홈페이지 내에서라도)
막이 끝날때마다 주제를 한줄로 표기하기때문에 일단 상황은 알겠지만 저들은 저 춤을 익히면서 안무가, 감독이 끊임없이 그때의 그 감정을 살리기 위한 배경설명을 많이 했을텐데 정작 이것을 받아드려야 하는 관객은 어떠한 정보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냥 너는 떡이나 먹고 가라. 떡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왜 만들어졌는지, 언제부터 먹기시작했는지 따위는 신경쓰지말고 입에넣고 씹다가 삼키면 되. 라는 것으로밖엔 다가오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해도 소화는 훌륭히 잘 된다. 왜냐하면 전문가들이 맛있고 소화 잘되게 잘 만들어놨으니까. 그래서 감동이 없었다는것은 아니다. 충분히 감동적이고 행위예술에서 받는 감동의 종류는 표현하기 힘들정도로 많기때문에 그중 몇가지에만 걸리면 마음은 동요된다. 저 무용가들의 미친 춤사위는 나를 흥분시키에는 충분한 능력들이나 역시 섭섭함이 남는것은 어쩔수 없다. 나의 문외한을 탓해야겠지만 이건 지극히 전문가들만을 위한 공연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오페라나 발레 기타 음악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공연에서 주된 것들(무용,노래, 음악극 등)에선 음악을 연주는 최대한 멋지게 하지만 정면에 드러나게 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주가 되는 것에 집중하기 힘들기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공연은 연주하는 분들이 무대 윗쪽에 제법 잘보이도록 세팅되고 연주의 현란함 또한 잘 보이도록 임의로 설정한거 같다. 그것때문인지 가끔 무용수들을 봐야 하는데 연주자를 보게 되는 내 모습을 보게 된다. 왜 이렇게 해놓은거지? 춤 스케치라는 슬로건을 내건 공연이면 저 무용수들에게 집중하도록 해줘야 하는거 아닌가?
늘 외지고 어두운 그늘에서 고생하는모습이 안쓰러웠나?
다른 특이한점은 여자 무용수 한명은 척추 전체를 문신을 한 사람이 있었다. 어떤 독립적인 배역이 있는 사람이면 이 사람을 위한 분장이겠거니 넘겼을텐데(남자들도 문신 같은 무늬를 몸에 많이 그려넣어서 주홍글씨 같기도 하고 계급을 뜻하는거 같기도 한 그냥 무늬 그림 문신) 맨몸이 잘 보이는 직업인 무용수가 실제 문신을 한다고? 영화 '존윅'에서 나오는 발레리나들이 문신을 엄청 하고 있긴 하지만 이건 영화에서 어떤 상징을 뜻하기때문인거 같고 몸의 선을 중시하는 무용수가 시선을 빼앗기는 특이한 짓을 한건 이번 처음봐서 좀 뭐랄까? 보는 내내 신경쓰여서 영 별루던데 차라리 남자배역을 맡아서 저들처럼 가짜문신을 했으면 신경쓰이지 않았겠지만 같은 역할들의 다른 무용수들과는 다른 그 튀는 모양은 꽤나 별로였다.(왜 했을까? 척추 수술을 했나?) 분장인데 내가 착각한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무용은 서양고전이나 한국고전과는 제법 다른거 같지만 그렇다고 난해한 현대예술도 아닌거 같고 좀 쉽게 풀어내려는 수많은 무대 장치들과 뛰어나며 직관적인 효과음과 음악들 그리고 무용의 조화로움 내용을 이해못하지만 그 흐름의 완결성이랄까? 표현의 아름다움과 경의로움을 느끼게 했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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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선보이는 구성이라고 하는데 공연은 네가지(적념,여창가곡,남도시나위,승무)로 구성되어있어서 여느 국악 공연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독특한점이라 하면 한공연이 끝나면 그 중간에 명상가(이정은)라는 분께서 나와 관객과 함께 한 5~10분정도 명상을 알려주고 함께 명상을 한다. 그러다보니 전체 공연의 한 30분정도는 명상을 했던 특이한 공연인데 공연과 잘 붙는가는 좀.. 그리고 공연장에 공조기 소리때문인지 고요함이 없고 기침하는 사람도 있고 무대뒤에서 대화하는 소리가 다 들리는 통에 명상을 하고 공연에 집중할수 있는 기획은 좋았지만 진행에서 좀 미흡하지 않았나싶다.
그리고 3일간 공연하는데 가만히 보니 3일간의 공연이 모두 다르다. 3일모두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은 공연을 내년에 또 할것도 아닐테고 이런식으로 하게되면 하루에 네가지씩 총 12가지 공연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을 하게되는데 문제는 과연 이 12가지 공연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레퍼토리가 많아서 어쩔수 없더라도 기획을 좀 다양하게 하고 기획 한개당 며칠간의 공연은 가급적 같은 공연을 하는게 어떨까 싶다. 이렇게 3일동안 모두 다른 공연을 하면 이중 한가지만 볼수없는 나같은경우 똥싸고 닦지 않은것 마냥 찝찝한 기분이 든다. 공연을 봤는데 3분의1만 본거 같은 그런 개운함이 없는 느낌
그리고 명상시간을 제외하면 공연이 매우 짧다. 평일 공연이니 너무 길어도 집에가기 불편하긴 한데 국립국악원(예술의 전당)이 외진곳에 있다보니 회사에서 끝나고 재시간에 도착하려면 고생좀 하는데 너무 짧으면 아무래도 섭섭함이 커지는건 어쩔수 없는거 같다.
평일에 이런 품격있는 공연 한편 기분좋게 보고나와 늦은 시간 집에 들어와서 잠을 청할때 그 안정감, 만족감, 충만감, 뿌듯함 등 수많은 기분들이 몰려들어서 힘들더라도 보고 싶은 공연은 안볼수 없다. 가급적 평일은 이런 국악,클래식과 같이 좀 시간이 지나 농익을대로 농익어 웬만하면 감동받는 장르가 아무래도 좋지.
이번 기획은 좀 엉성했을지 몰라도 공연예술을 접하기 전에 몸과 마음을 차분히 하면 한결 집중이 잘 되서 중간 중간 명상전문가 나와 명상하는것도 괜찮은 생각같다. 너무 형식화하진 말고 가볍게 다음 공연에 집중할수 있을정도로만 그리고 시간은 최대한 짧게, 주된 공연의 시간이 너무 짧아지면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받을수도 있으니 살짝 맛만 보는정도? 심호흡정도?
이번 공연에서도 느낀거지만 난 승무를 참 좋아하는거 같다. 그 속에 숨긴 의미는 공부해본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바라춤도 그렇고 오늘은 남성이 나왔는데 기개가 있어보이기도 하고 확실히 남성은 여성에 비하여 힘이 좀더 있는 느낌이지만 남녀 크게 다름은 없을거 같다. 승무를 보고 있으면 종교적 색채보다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거 같기도한, 신비한 세계를 간접적으로 엿보는 기분도 들고 품격있게 절제해놓은 느낌이라 감동마저 절제되는 느낌이다. 인도나 중국에도 이런 승무가 있는지 찾아보면 중국은 무술로 발전했다는데 쿵푸를 보면 격투보단 어떤 선을 유지하는 일종의 예술 같긴 하다.
평일에 보는 공연은 신사동 살때가 교통이 좋아서 좋았는데.. 밤에 밥 먹을때도 많고. 군자동은 10시정도 되면 술집 말고 밥집은 빨리 닫는거 같은데 이게 정상이지만 그래도 출출하면 좀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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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보면 한 인물의 심리변화를 나타내는거 같다. 침묵하다가 어떤 사건으로 의심하고 그러다가 깨달음으로 그런데 오산이다. 제목만으로 추정하는 것은 이제 그만해야 할 시기인거 같다. 제대로 맞추는 경우가 극히 없는데 왜 시놉을 보지 않고 제목만 보고 예매하는건지..
물론 예매한 후에 잊고 살기때문에 예매할때의 추정이 기억나는 경우는 잘 없지만 그래도.
천주교의 신부 3명이 등장한다.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같이 캐릭터가 극명하게 갈리는것은 아니지만 각각 인물마다 개성이 있고 보통 세명의 친구라고 하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구성원이지 않을까싶은 설정이다.
중계하는 한 사람과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 그러나 셋 모두에게 얘기못하는 애환을 가지고 있다. 젊었을 한때의 추억도 일부 공유하고(이러지 않으면 친구라 하기에 좀 그렇지)
기승전결이 명확하다고 할까. 줄거리는 뻔할뻔자지만 보이는 흐름과 구성, 배우들의 일품 연기와 소소한 재미들 소재가 다양하면서 지루하지 않게 잘 꾸며져있다. 다만 내가 이쪽 세계의 용어를 잘 몰라서 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안되는 것들도 좀 있는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그냥 흘려도 되는 그런 시시콜콜한 우리내 삶 같은 이야기들이다.
친한 친구 셋이 모여 술을 마시다가 한 친구가 자신의 현실과 맞지않는 쪽으로 흘러가는것을 나머지 두 친구가 막으려다가 결국 자신들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아 한숨 푹푹 쉬는 그러면서도 은연중 끈끈하게 연대되어 있는 동무들..
예전 TV 드라나 '세친구' 같다고 해야 하나.. 잘난놈, 덜 잘난놈, 노는놈 셋이 친구가 안될거 같지만 동무가 된다는 것은 공통된 관심사와 어느정도 맞는 정서와 표현력 등 많은 것들이 맞아야 동무가 될텐데 연극에서는 그러한 점을 잘 파고든다.
그래서 서로 말싸움을 독하게 하더라도 찐득함이 잘 표현된다. 흐름도 어느정도 예상이 충분히 되는 상황이라서 마음 편히 저들을 받아드렸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한 신부가 신부직을 버렸다면 어땠을까? 연극을 좀더 길게 가고 해피엔딩으로 끝내기엔 어려운 진행이겠지만 이게 더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천주교 신부는 교회 목사가 될순 없는건가? 그리고 신부가 그만둘땐 교황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고 연극에서 나오는데 천주교는 세계의 거대조직이란게 거짓이 아닌거 같다.
지금생각해보면 전체적으로 밝은 늬앙스의 연극이었나? 싶기도 하다. 서로 싸우는 것이 거의 3분의 2는 되는데 중재하는 신부가 있어서 극단적으로 흐르진 않았지만 절반 이상을 주된사건과 시시콜콜한 사건들로 언성이 잦아들때가 없었는데 말끔하게 끝난것도 신기하고 극장을 나올때의 뒷맛도 가볍다. 신파같은거 없고 한국드라마처럼 일순간에 개연성은 개나 줘버리고 끝내버리는것도 없다.
이런 드라마가 갖는 특징이겠지. 뻔하지만 그 뻔함을 뻔하지 않게 잘 꾸며놔서 누가 봐도 삐딱하지 않을 조금 큰 극장에서(달오름이나 정동같은곳) 공연해도 충분히 매력 넘칠 연극으로 예쁜 가을날에 적합한 연극이 아니었나싶다.
그런데 직장인 할인은 뭘까? 백수는 어떻게 하라고? 제발 이런 이상한 할인은 없애주고 만원 낮은 가격을 기본가격으로 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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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녁 7시30분 공연인데 중간 쉬는 시간 포함해서 170분? 가끔은 이렇게 한밤중 공연 한편 기분좋게 보고 집에 오는것도 좋긴 한데 집까지 또 한시간을 가야하니 쉽지 않다. 올해는 앞으로도 적지 않은 편수를 평일공연으로 예매해놨으니 조금은 한숨이 나온다.
흔한 심청을 생각하고 왔다가 큰코다칠수도 있을수 있지만 전체적으론 그렇지 않다. 일단 한 90%는 심청전 줄거리를 거의 그대로 따른다. 1인 판소리 장르를 떼창으로 하니 다들 끝까지 좋은 목 상태를 유지해서 안쓰러움도 없고(한명이 하는 판소리 완창은 언제나 힘들어 보임)
현대적인 의상, 현대적인 배경으로 바껴있다. 현대물로 완전히 바꿔놓은것인가? 고전 '로미오와 줄리엣'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현대 버전같이?
인당수에 빠지는 부분까지만 봤을때는 옷만 현대적이지 그냥 고전물인가 싶었는데 끝은 그것과 거리가 멀어보이고 이해하기도 쉽지는 않았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들이 눈을 뜬다?까지는 내용 흐름상 장르가 판타지니 그러려니 하는데 이번 각색된것은 저 소녀의 정체는 무엇인가? 심봉사는? 환경은 조폭에게 당하는 일가족을 말하는거 같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무엇을 상징하는지 이해안되는 부분이 많다. 파격적이네 뭐네 하긴 하는데 기존 극에서 잔인성을 부각하게되면 웬만해선 파격적이 된다. 이 창극 역시 노랫가락으로 부드럽게 넘기는 부분을 좀더 현실감 있게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져들때 다리를 묶고 무거운 물체에 매달았다거나 하는건 아무리 심청이의 심정이 굳건하더라도 죽음앞에선 쉽지않기때문에 잔인한 현실의 실감나는 설정이다.
전제적으로 다른 공연에서는 접하기 쉽지 않은 기괴하면서 아방가르드(전위적)한 창연극인데 이런류의 특징이 너무 작가주의적이라서 이해해야 하는 관객입장을 잘 고려되지 않는다는것이 심각한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그래서 한국사람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알고 있는 심청전을 보면서 ???????? 라는 물음표가 나오게 하는것이겠지
좀 그렇고 그런 내용을 무대장치와 음악 그리고 창으로 떼우고 있는거 같다.
처음보는 광경으로 카메라맨 한명이 라이브로 계속 무대를 왔다갔다하면서 찍는다 그것을 무대 윗쪽에 실시간으로 적절하게 화면으로 뿌려지는데 개인적으로 저장영상을 무대에 플레이하는걸 싫어하지만 이번은 획기적이라 해야 할지 단순히 막 찍는걸 그냥 보여주는게 아니라 잘 짜여진 동선 그대로 연출이 원하는 그림을 그대로 만들어가는듯, 관객은 영상이나 무대의 배우들이 하나된 공연을 보는듯 거슬림 없는 훌륭한 무대를 만드는걸 보면서 감탄을 안할 수 없었다. 특히 흑백으로 표현되는 영상은 그 특유의 자극적으로 부각되는 표현은 일반 무대의 배우들에게 볼 수 없는 모습으로 인물의 이중적 모습을 실시간으로 감상할할수 있다. 다만 카메라맨이 기계를 주렁주렁 매달고 왔다 갔다 하니 시선을 빼앗기는거 같아서 좀 그렇지만 아무튼 오랜만에 느끼는 신선하고 창의적 연출을 본거 같은 뿌뜻함? 기분좋음? 대충 그런느낌이긴 한데
심청전 배경엔 분명 인신공양이 있었던 무지한 세계였을것이다. 왕과 함께 죽는 순장도 조선이전에 있었을정도였으니 인류 역사 한 1~2백년만 앞서가면 얼마나 미개한 생태계였는지 단번에 알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 인신공양은 대부분 여자아이, 갓난아기등을 했다는 것이다. (여아를 주로 했던것은 아무래도 전쟁으로 남자수가 부족하고 성인여자는 출산과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니 그런것이 아닌가생각됨)
아무리 그렇다고 지금 시대의 여자 아이들이 떼로 웃으면서 나오고(거의 백명은 되보임) 나중에 심청이가 죽고 다시 살아났을때도 떼로 서있는 장면은 뭔가 섬뜩하다. 특히 초입부분에 아이들이 막 웃을땐 공포심마져 들던데 일부 중년 여성들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귀엽다고 좋아하지만 나는 왜 공포심으로 다가왔을까? 인위적 웃음소리를 떼로 들어서 그런것인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웃어서 그런가? 물론 나는 저 웃음을 공감못한다. 심청이의 추정나이는 15세정도로 중학생정도인데 저 아이들은 누가봐도 초등생들이니 심청이 나이 15세면 그 시기 기준으로 결혼할 수 있는 나이로 예전 환경으론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시기라서 아이로 보기엔 무리가 있는데 저 기괴한 아이들의 설정은 무엇일까? 작가가 당시의 나이와 지금의 나이를 착각하는것인가? 꼬맹이 철부지 아이의 심청이를 생각하는것인가?
그리고 현대의상까지는 그러려니 하는데 심청이의 어머니(곽씨)가 돌아가셨을때 마피아, 조폭같은 의상은 뭐지? 심학규가 엄청 잘 사는 조폭인가?싶었다. 그런데 조폭같은 사람들은 심학규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냥 상가집에 온 사람들인데 한국사회에서 상가집에 방문한 사람들의 태도가 저렇다고? 어디서 조폭영화만 잔뜩 보고 온것일까? 이 연극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심청전이 무슨 전쟁, 스릴러, 폭력물인줄 착각하지 않을까?
그리고 심학규가 심청이 젖동냥할때 정말 무서웠다. 검은색 상복을 입은 여자들이 저고리 한쪽을 모두 풀어해치고 무표정하게 서있다. 그것도 수십명이.. 마치 자신은 젖동냥하는 마네킹인냥.. 그래서 더욱더 심봉사가 조폭 두목이고 저 여자들은 어떠한 환경으로 억지 젖동냥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인식했다. 물론 그것과는 관계없는 나만의 오산같다. 이런 전위적이며 추상적인 장르의 특징인 작가가 꼴리는대로 설명하니 좀 거북스럽고 이해가 안되는것은 필수인가. 이런것을 파격이라 하면.. 심청이가 심봉사를 이용해 돈벌고 장기 팔고 흥청망청 사는 내용으로 바꿔놔도 파격이라 포장하겠지.
현대적 해석은 일단 고전의 내용을 충실히 하면서 현대인들의 시각을 가미해서 재해석해야 하는데 이렇게 비꼬아놓고 해석을 달리했다는건 납득하기 쉽지 않다. 이 작가 작품중 '점찌고 옹녀'를 봐도 여성주의적(페미니즘) 시각으로 좀 이상하게 꼬아놔서 비주얼은 좋아도 막상 내용은 별로였는데 이 작가의 특징인지..(작가마다 뷰에 몰빵하고 내용은 겉치레에 불과한 사람도 있고 반대인 사람도 있고)
아무튼 이상한 오해를 받을수 있는 충분함이 있다.
그리고 장승상댁 부인은 무슨 매춘부 알선하는 사람처럼 묘사하는건 왜일까. 조폭 느아르를 만들고 싶었던거인지도 모르겠다. 선인을 악인으로 바꿔놓는것이 현시대의 시선이란소린지 아마도 이부분은 심청이가 막판에 만신창이가 되니 그 일환으로 장승상댁도 그런 주변인물로 바꿔놓은것일수 있긴 하지만 이럴바엔 '심청'이란 제목을 쓰지 말던가. 이게 이렇게 되면 심청전 원전대로 만들어지는 공연을 볼때 색안경이 씌어지지 않겠나. 선악이 갈리는 장르는 아니지만 묘사된 인물의 성품에 색이 있다면 그 성향은 바꿔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전 조폭을 미화하는 영화가 문제 됬던것은 수많은 사람 중 소수가 미화된 혹은 악화된 것을 그대로 받아드려 사회 문제가 될수 있기때문 아니었나)
그리고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보이도록 만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공양미 300석을 시주하면 눈을 뜰수 있다고 얘기했던 화주승을 거의 악의 화신처럼 그려놓고 있다. 공양미 이야기 자체가 가스라이팅해서 자신의 딸을 사창가(장기 매매인가?) 같은곳에 팔라고 강요하는듯한 나쁜놈의 우두머리처럼 그리고 표현한다. 이름이 요나김(김요나라고 한국 이름표기법대로 사용하는것도 아니고 외국 방식대로 했다는것은 자신은 한국인이 아니라는것을 표현한것일텐데 한국사람 껍떼기를 한 외국인인가? 글로벌시대에 이런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국사람인척 하면서 뒷구멍으로 한국 욕하고 자신의 이익추구만을 일삼는 매국노들이 문제지)이던데 종교적 색채가 묻어나오는건 나의 선입견때문일거 같다. (찾아보면 요나는 남자 세레명이라 하던데 이분은 여성 아닌가?)
전체 배경이 조선시대 어떤 효를 강요하듯 꾸며낸듯한 이런 내용이 아닌 거친 배경에서 생존을 위해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세상에 악마화 된 종교인이 없을리는 없겠지만 심청전에서 화주승이 갖는 의미는 종교에 대한 어떤 망상같은 성찰과 거짓 능력 등이 부각되는 주된 장면으로서 서유기에서 멍청해보이는 삼장법사가 지니고 있는 종교적 상징성과 비슷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인물인데 시정잡배, 사기꾼따위로 만들어 놨다는것은 기독교의 에반겔리즘(복음주의)으로 비롯된 배타주의의 파생이 아닐까? '너네가 믿는 저 종교의 뒷모습은 이렇게 추악한 사탄과 같은 존재다~'라는것을 우회하여 비꼬듯
화주승때문에 심청이는 인당수에서 죽게 되는데 문제는 이로인해 다시 살아나고 황후(조선시대에 황후가 있나?)가 된다는 온갖 설화를 막 가져온듯한 이상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전체 뼈대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고? 그것도 사상적 뼈대가 되는 불교와 도교의 자비롭고 신비로웠던 세계를 개깡패같은 놈으로?
작금의 한국은 이상한 미신에 휘둘려 나라가 개판일보직전까지 몰렸다가 한국 민중들께서 합심해서 간신히 위기를 되돌려놓은 상황이니 종교의 폐해를 모르는바 아니지만 그렇다면 고전을 현대물로 재해석하는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신작을 만들어야지 멀쩡히 있는 과거로부터 사랑받아왔던 한국인 정서에 잘 부합하는(아비가 딸을 파는것 말고) 내용을 가지고 와서 썩어버린 사회에서 치유되지 못하게 만들어놓는것은 어떤 저의가 있는지 솔직히 의심스럽다.
이 공연을 본 사람은 앞으로 심청전을 효녀심청이로 볼 수 있을까? 영화 '아마데우스' 때문에 살리에르를 천하에 못된놈으로 바꿔버렸는데(아무리 영화적 허용이라해도 이러면 안되는거 아닌가?)
효자,효녀란게 과거에 허벅지 살을 도려내어 부모님을 공양했다는 것이 지금 통용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판소리 심청가는 전체적으로 보면 좀 해학스럽다. 심청이 어머니는 가부장적인 남편을 극진히 모시고 심청을 낳았지만 딸이라서 좀 서운해 하기도 하고 (심학규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심학규가 봉사기때문에 부귀영화도 힘든 상황)
심청이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대목은 무척 슬프다만 이 후부터는 심학규와 심청이의 부녀지간 사이도 적당한 그냥 형편 어려운 가정이었다. 딸자식을 어떤 꾀임에 빠져 300석에 팔았다손 치더라도 황당한건 생각보다 심학규의 삶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는것 뺑덕어멈과 동거를 할때도 딸 팔아 공양 후 남은 돈으로 적당히 잘 먹고 잘 살다가 돈이 거의 떨어질 무렵에 심청이는 인당수에 빠져 죽다가 살아나 용궁에서 엄마도 보고 착하게 살았다고 황후가 되서 맹인잔치를 열고 각 고을에선 돈을 줘가며 잔치에 보내니 심학규 입장에는 땡큐 아닌가?
제일 특이한건 심학규는 맹인잔치에 가면서 뺑덕어멈을 잃었지만 홀로가면서 여인네들 일좀 도와주며 밥,고기 등 얻어먹고 옷을 홀라당 잃어버렸음에도 기지를 발휘해 옷, 노잣돈, 담배(당시엔 비쌌다고 함)도 얻는등 웃기게도 좀 황당한 호사를 누린다. 게다가 안씨를 만나서 결과적으론 재혼까지 하게 되는데 안씨는 부자기도 하다. 아마도 심청전에서 승자는 심학규가 아닐까싶을정도
심청전의 특징은 웬만해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행복하게 끝난다는 것. 심청가, 춘향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 이런 한국 공연문화를 보면 한놈만 완벽하게 나쁜놈을 만드는 경향을 보긴 쉽지 않다. 그래서 결국 다같이 조화롭게 잘 살아간다는 황당한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특정 종교적 시선이 가미되면 선악이 확실하게 구분되면서 중간에 선을 딱! 그어놓으려 애쓴다. 이번 '심청' 창극을 꼭 그렇게 볼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3시간 남짓되는 동안 해학은 어디에도 없고 우울하고 암울하며 더럽고 추악하다. 영화 '베트맨'의 고담시티나 영화 '씬시티'같이 디스토피아도 아니고 유토피아도 아닌 못된짓을 하면 적당히 밥은 먹고 살거 같은 세상이랄까?
왜곡된 섹스어필, 이런 배경이라면 당연히 필요하겠지. 괴기스러운 여자들, 북에 피는 왜 발라놓은것일까? 이럴때 피는 여자의 그것을 상징하긴 하는데 그것이 맞을까?
오늘 콘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였지만 퇴근 후 3시간동안 졸음따위는 개나 줘버린 몰입력 끝장나는 창극이었으나 무엇인가 가슴한편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남아있다는것은 전위예술의 특징이려나.. 신선함은 최고인데 무엇이 불편하게 만드는걸까.. 재미있는지 없는지 가늠하기엔 어려우니 두어번은 더 봐봐야 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