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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맨 앞자리 티켓을 샀다니.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앞자리를 샀겠지만 무대가 너무 높아서 오케는 앞 두어줄밖엔 안보인다. 하지만 연주자들의 생생한 연주소리를 들을수 있는것은 엄청난 잇점이긴 한데 목이 약간 아프고 북소리는 아무래도 소리가 크다보니 귀에 조금은 쌔게 온다. 아무튼 맨 앞자리는 어쩔수 없는경우 아니면 구매하지 마시길.. 목아픔 (연극같으면 앞자리라도 크게 문제될거 같지 않음)
국악기로 관현악단이 있을수 있을까? 관악기를 보면 태평소, 피리, 단소, 생소중대금류, 그 외 길쭉한 나발, 소라같은것도 있고 현악기는 해금(깽깽이), 가야금, 아쟁, 거문고 타악기는 북, 꽹가리(이건 관현악기로 넣기엔 좀 무리가 있으려나), 징, 장구 같은거
분명히 한국 전통 악기의 종류도 서양 악기 만큼이나 다양하고 각각의 독특한 음색들이 있다.
그래서 산조(일반적인 독주로 봐야 하는지 궁중음악을 빼면 모두 산조로 보면 될려나)는 좋은데 합쳐지면 뭐랄까... 서양악기들의 조화와는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국악기들의 음색은 거칠어서일수도 있는데 악기에 노이즈가 너무 섞여있다고 하면 맞을런지 바람소리가 많다고 해야 할지 현악기들도 현들의 투박하고 거친 소리는 해금마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양악기들은 이런부분에서 체계가 잡혀서인지 음색이 엄청 정갈하고 맑은편이다.
이번 국악악단에도 북은 팀파니가 있는데(더블베이스도 있는거 같음) 그 소리는 역시나 엄청 튄다. 개인적으로 팀파니의 소리는 북소리중엔 단연 으뜸이라 생각하는 입장에서 국악기의 거친 소리들과는 합쳐지기 쉽지 않게 느껴졌다.
소리가 명학하게 나뉘는 서양악기라고 해서 좋다는 의미는 아니고 단지 음색이 그러하니 연주형태나 청감에서도 느낌 차이가 크다는 것인데 거칠고 투박한 음색은 역시나 내면으로 침투하기엔 좋으나 이건 솔로일때 그런것이고 합쳐지면 비수같은 날카로움을 살려내기란 쉽지 않아보인다.
한국 고유 악기로 악단을 꾸려가는 단장의 최대 고민거리겠지만 오늘은 과거의 그 모래먼지같은 느낌은 확실이 줄어든 신기한 경험이었다.
아직까지 악단은 어떤 배경 효과음같은 조성이 많기는 한데 이런부분도 훨씬 극적이고 가야금, 피리 산조에서 서로 주고 받거나 받쳐주고 띄워주는 역할이 대단히 좋아서 웅장하면서도 감동적인 서양오케에서 맞보는 짜릿함을 국악단에서도 제법 감동적으로 느낄수 있었다.
가야금산조 협주에서 가야금이 그다지 극적인 악기는 아닌지라(악기때문인지 연주법때문인지는 모름) 감정을 끌어올려놓은 악단의 기조를 고스란히 받아내기엔 쉽지 않았지만 분위기를 바꿔놓는데는 충분한 협주자로서의 역할이 훌륭했다. 가야금이란게 쫘~악 뻗는 음색이 아니라서 웅장함의 바텀을 받아내기란 쉽지 않았을텐데 수십년간 닦아온 연주실력으로 만족스럽게 이끌어가는 모습은 산조를 들으며 울컥하게 만드는 드믄 경험이었다.
피리연주의 여유로운 솜씨(평생을 공부한 전문가들의 여유랄까?)는 표정에서 부터 즐기는것이 느껴질정도다. 무대를 즐기며 연주하는 모습은 전쟁터 가장 앞에서 말을 타고 전진하는 장수같은 풍모와 기개였다.
국악기 특유의 거칠고 투박한 놈을 노력으로 다져진 실력으로 모든것을 커버치는 진정한 명인들. 아마도 오늘의 모든 연주자들과 지휘자가 그러하지 않았나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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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오리지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서편제 하면 영화밖에 몰랐기때문일거 같은데 영화와 똑같은 연극을 만들었다는 건지.. 막상 진행을 보면 영화는 많이 달라서 영화가 아닌 또다른 원작이 있나?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영화 '서편제'는 김명곤 배우께서 각색한것이었다. 영화 '서편제'는 영상미도 뛰어나고 음악도 좋고 유명한 진도아리랑 부분은 몇번을 봐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연극은 아무래도 무대의 한계도 있고 배우들의 컨디션도 매번 다르고 중간 중간 구성을 바꿀수도 없는 등 일단 무대에 오르면 어려운점이 많지만 그럼에도 잘 만들어진 연극은 롱런할수 있고 때에따라선 수백년을 갈수도 있기때문에 나름 매력이 있는 분야라서 영화를 연극으로, 연극을 영화로 변환하는 작업은 항상 있을거란 생각이다.
시작하자마자 처음 딱! 느낀것은 어? 음향이 왜 이러지? 무슨 70년대 라디오 소리같은 이 멍청한 음향은 무엇일까 소리꾼들은 오랜시간 노래와 목소리를 갈고 닦기때문에 특유의 쇳소리가 웬만하면 섞이기 마련인데 음향의 벨런스가 개똥같다. 공간감도 없고 없고 음질이 좋은것도 아니고 심지어 북소리가는 메아리가 친다.(크지 않는 공연장에서 앞뒤 이중으로 소리가 들리는 경우가 있다니)
여기가 그렇게 음향이 후진곳이 아닌데 음향감독이 난청이거나 졸았거나 하지않으면 이렇게 후진 음향을 만들수 없다. (국립국악원도 꽤나 후졌는데 정동극장의 이번 공연은 훨씬 후진 느낌임)
판소리, 민요, 굿 다양한 소리들이 나온다. 그리고 다들 뛰어난 소리를 들려준다. 다만... 창을 하는 사람들이라 그런가? 연기가 어째 좀....... 소리극은 소리보다는 연기를 잘 해야 하는 공연예술일텐데 소리는 다들 멋지지만 막상 연기가 좀 거칠다고 해야하나 전체적으로 좀 엉성하다고 해야 할지.. 이래서 영화 '서편제'가 가끔씩 그리워진다. 다른 작품이 떠오르면 이미 끝 아닌가?
그리고 음향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악기소리가 소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중간보다 약간 뒷자리에 앉았는데 귀가 자극될정도로 거친 북과 꽹가리 소리. 이런 소리가 메아리까지 쳐대니 아주 가끔은 아주 개판같은 소리가 난다. 자주있지는 않고 감정이 격해질때 특히 좀 거북스럽다고 해야할지
이런 몇 가지들 빼면 참 멋진 공연이 아닐수 없다. 아무래도 원작 자체가 우울해서 들어있는 대부분의 노랫가락이 슬프고 구성지다. 특히나 판소리 일부 대목은 눈물 글썽이게 하는데 그런대목들만 왜 그리도 많이 가져왔는지 흐름으로 보면 차분하고 고요해야 하는데 판소리대목때문에 울컥 울컥 한다. (내가 판소리를 그렇게 깊이 아는것도 아닌데 왜 습관이 잘못 들었는지 순간순간 노랫속 상황으로 빨려들어감)
후반부엔 좀 지리하게 끄는 경향이 있어서 2부땐 65분으로 1부때 70분에 비하면 짧은데도 지루한 부분이 많다. 길지 않은 내용에 소리를 잔뜩 넣고 감정을 살리고 이것저것 첨삭을 많이해서였나 극적인 느낌은 크게 없고 한서림도 크게 다가오지 않아서 상황에 맞는 노랫가락들은 좋지만 내용면이나 구성에선 섭섭함이 있다. 이게 어떤 느낌이냐면 판소리 완창을 듣는것이 훨씬 극적이고 재미있다는 기분이 들정도였다.
소리극이라 해서 소리를 잔뜩 넣었겠지만 이것보다 중요한것이 스토리 구성 아니겠나.. 음악극이 노래만 좋다고 멋진 극이 되진 않듯 말이다. 쉬는 시간없이 2시간 컷! 하면 개운하지 않을까? 주제넘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무대를 불필요하게 빙글빙글 돌리지 말고(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면 어쩌자는건지) LED Wall를 쓸때 조심해야 할게 관객 눈알이 빠르게 좌우로 움직이면 레인보우 현상같은게 보이는데 이게 엄청 거슬릴수 있고 눈의 피로감도 커진다. 그러니 작작 쓰거나 웬만하면 쓰지 말자. 아니면 눈알을 아무리 움직여도 잔상이나 깜빡임이 보이지 않는 고주사율 패널을 쓰던가.
마지막으로 가격인데 7만원이면 너무 비싼거 아닌가? 국립극장 홈피 가입회원은 30% 할인? 이딴 빙신같은 할인정책을 내놓지 말고 그냥 30% 낮춘 가격으로 판매하자.. 국립극장 홈피에서만 팔던가 (문화릴레이티켓 할인은 10%? 이거 조롱하는거 같은데?)
솔직히 30% 낮춘다 해도 비싼 느낌이다. 무대도 그렇게 공들인 느낌 없고 배우분들의 연기도 프로페셔널하진 않고 무엇보다 음향은 최악. 왜? 커튼콜때 사진은 못찍게 하는걸까? 인사는 뭐같이 길게 해대면서.. 커튼콜 사진 못찍는다길래 끝 인사가 없는줄 알았더니 엄청 길게 왜 별다르게 내세울게 없는 공연일수록 이런 그지같은 정책을 내세우는건지 이해가 안된다. 사람들 오랜만에 공연보러와서 기념으로 한컷 찍는 재미도 있는것인데. 뭘 그렇게 숨기려드는건지.. 쥐뿔도 없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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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예전에 국립극장에서 했던것을 보고 반해서(?) 산울림에서 하는것을 보게 되었다. 당시 반했다는것은 엄밀히 보면 박정자 배우의 연기에 감탄을 한것이지 내용에 대해서까지는 아니다. 내용자체는 수많은 말장난 속에 살짝 살짝 비치는 상황이나 심정, 현상, 배경 등이 보일랑 말랑하지만 대사량이 많아서 곱씹고 곱씹지 않는이상 한귀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다.
아무튼 그때 그 충격을 잊지 못하고 다른 배우들의 작품, 산울림 하면 일단 연기의 완성도는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곳이니 약간 높은 금액이지만 구입하여 오늘 기대하며 보게되었다.
장장 3시간(중간휴식15분 포함) 연극으로 국립극장 신구, 박근형 두분이 나오는 작품이 140분(휴식시간 포함)인데 근 한시간 가량이 길다. 3시간 공연은 판소리 완창 같은 경우나 있지 흔하진 않은 공연 시간으로 신경통이 올라올까봐 시작전부터 걱정이 앞선다.
덩그러니 놓여있는 말라버린 나무 한그루. 난 이상하게도 포스터에 나온 이 나무를 보면 돼지 꼬리가 생각난다.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 때문일수도 있다. 그림자만으로 생각하면 매우 흡사하다. 홍상수 감동이 이것을 감안하고 포스터를 만들었는지 모르겠고 내가 그것에 걸려들었을지도 모르겠다. ^_^
초반부터 달려드는 엄청난 말들.. 소재가 다양하고 템포가 대단히 빠르지만 간결하고 정갈해서 산만함을 느낄수가 없다. 강약고저 감정 변화나 전환도 능숙하다.
내가 작년에 봤던 연극이 이 연극이 맞나? 싶을정도로 새로우면서 신선하다. 연극속으로 미친듯 빨려들지만 문제는 대화의 내용. 이게 무슨 내용일까? 예전에 신구 배우와 박근형 배우 두분도 이런대화를 나눴단 말인가? 그런데 난 전혀 이런 기억이 없을까? 너무 대형 극장이라 디테일한 묘사는 기억에 남지 못한것인가.
지금은 배우분들이 바로 내 앞까지 온다(난 앞에서 두번째 자리). 저들의 호흡과 시선, 심장의 떨림 등 많은 정보가 쉼없이 전달되어 온다. 포조의 괴팍하면서도 어리석음 그 자체가 극장 가득 채워넣는다.
조금 아쉬웠던건 박정자 배우의 역, 바로 럭키인데 이번은 좀 그때와는 다르다. 정말 고통받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할까? 물론 극중 배역자체가 노예니 지금 보이는 저 럭키가 타당할수 있지만 그 명쾌하면서 직설적인 박정자 배우의 럭키를 보고 싶었던것은 나의 착각인지 모르겠다. 이부분은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하는지에 따라 다른것일뿐 럭키를 맡은 저 배우의 연기가 이상하다거나 한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냥 머리속에 레퍼런스라고 들어있던게 고작 한가지밖에 안되다보니 이런 기분이 들었을뿐 다음에 다시 본다면 지금보다 더욱더 강렬히 다가갈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전에도 이렇게 대사량이 많았나? 쉼없이 움직이고 쉼없이 이야기 한다. 심지어 같은말을 반복하더라도 끊임없다. 물론 내용의 대부분은 이상한 대화들이고 템포가 빠른관계로 되짚어가며 볼순 없었다. 좀 코믹한 요소들이 제법 많이 섞여있던데 이 작품이 원래 그런건지 아직 희곡을 읽어보지 못해서 어느정도 각색이 된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용이 그렇게 많아보이진 않아서 희극적 요소를 연출이 많이 넣었던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 희곡은 많은 뒷 맛을 남긴다. 무슨 내용인지 난해하더라도 블라디미르나 에스트라공 이 사람들은 무엇을 상징할까? 포조와 럭키는? 그리고 소년은. 고도(Godot)를 신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작가는 자신도 모른다고 이야기 했지만 작가 심연엔 무엇인가 연상되어 나온 것이것이니 작가의 의도를 이해할수 없더라도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인간의 어떤 이상향를 뜻하는것은 맞지 않을까?싶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이둘에게는 적어도 적용되는 말같다. 소년은 이 두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체일테고 메시아 까지는 아닌거 같다. 그렇다고 고도도 메시아 스럽진 않고 그 자체일거 같지만 이것은 이들간의 상상속에 머무는 존재가 아닐지. 인간의 고통을 참을 수 있는 알다가도 모를 희망이란것 그리고 이것을 놓지 않기위해 계속 애쓰는 보이지 않는 끈
그렇지만 주변에선 수많은 유혹들이 생겨난다. 그것이 포조와 럭키와의 관계가 아닐까? 하지만 이들은 하루만 지나도 기억이 리셋된다. 왜일까? 우리가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다가오지 않는 미래를 원한다는것이지 힘든 과거를 돌이켜보기위함은 아니다. 대표적인 망각의 동물이 바로 인간 아니던가. 그리고 세상은 나를 기억하지 않기때문에 다음날 포조와 럭키는 이들을 기억못하는것일테고 자신들의 아픈 기억인 왜 장님이 되었는지도 단 몇시간이 지났음에도 기억하지 않는것이겠지.. 이런것들은 단지 내 생각이다.
이 작품이 좋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다양한 생각들을 포용하기때문일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온갖 이상한 말로 떠드는 저들을 보며 자신이 살아왔던 과거와 살아갈 미래를 그려볼수 있기때문이 아닐까.
끊임없이 주저앉고 싶은 유혹들 하지만 그속에서 혹시 하는 마음에 한걸음 한걸음 다음 시간으로 달려가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그리고 나. 정말 아름아운 연극이었다. 3시간 공연이라곤 믿기지 않을정도로 몰입력이 대단한 연극을 볼수 있어서 추석연휴에 온 큰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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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는 카스트 제도가 폐지되었다곤 하지만 아직도 어느정도 유지되고 있는거 같다. 조선 말 노비제도 폐지되었지만 1900년대초까지 노비 취급 받는게 없어지지 않았으니 쉽지 않을것이고 인도는 땅도 크고 인구도 많아서 오랜시간 세습됬던것을 일순간에 바꿔놓을수 있겠는가. 특히 지배계층은 계속 유지하려고 하니 쉽지 않을것이다. (7개의 언어가 있다는걸 보면 최소한 7개국의 연합국 형태라고 봐야하지 않나)
도비왈라란게 빨래하는 사람이란 뜻이라는데 불가촉천민들의 생활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몇년도인지는 모르겠다. 브라만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라훌이 외국으로 유학도 가고 카스트도 폐지된 후 인거 같으니 1990년대 후 2000년대 무렵이겠지.
아무튼 말 그대로 서민들의 삶이다. 한국은 과거 달동네나 천계천 판자촌이 그와 비슷하려나.. 어차피 카스트는 국가차원에 폐지되었으니 차별 하진 않겠지만 문제는 공부를 할수 없다. 돈이 없으니.. 공부를 하려고 해도 안되겠지..
이런 환경에서 빨래하는 아버지의 강요로 공부하고 싶어하는 실파는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고
도비들을 관리하는 라훌의 아버지는 라훌을 외국으로 유학보낸다? 뭐든 대가리들은 잘먹고 잘 사는건 세상 이친가? 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들어와 인도의 한 정치인과 연이 되어(라훌 아버지의 노력으로) 자신의 고향에 이상한 사업을 하려고 한다. 빨래터를 없애고 세탁기를 넣어서 빨래하겠다는 구상.. 세탁기는 무상으로 설치하겠다는데 이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도비들을 없애겠다는 소린지.. 라훌의 이상한 이상은 좀처럼 이해되진 않는다. 세탁기가 이곳에 설치되면 도비들의 일자리는 사라질게 뻔한데 정치인의 말에 현혹된것인지 자신의 야망을 위해 자신의 고향사람들을 포기한건지..
이런 관계속에도 행동파가 있으니 바로 실파. 한맽힌 여성이고 라훌의 설득으로 라훌의 이상을 함께 따른다.(이상이 뭔지는 모르겠음)
깡패는 언제나 비슷한 역할을 하는거 같다. 물론 극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 깡패들의 삶은 모른다. 아무튼 어떤 연극,영화를 보더라도 그 행태는 비슷하다. 주도적이지 못하고 빌붙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모든 수단을 이용한다. 주로 폭력이겠지만 아무튼 명분을 어떻게든 만들어서 합법적이며 합리적이란 허울을 씌우려 애쓴다. 이 플롯은 어딜가나 똑같은데 왜 그런건지 모르겠다. 실제로 그런건지. 너무 많이 나와서 작가 자신도 모르게 세뇌된것인지
연극은 전체적으로 몰입감은 괜찮았는데 실파가 갑자기 감정이 폭발한다고 할까? 왜 저러지? 라는 대목이 한두곳 있는거 같은데 워낙 거세게 밀어붙이는 통에 큰 반감으로 다가온다. 집중해서 본다고 봤는데 순간 놓친부분이 있었던건가? 그래서 저 배우의 감정선을 이해 못한건가?
전체적으로 보면 클리세도 좀 보이지만 110분 정도 되는 짧지 않은 공연치고 크게 지루함 없이 볼 수 있었다.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행태인지 아니면 내면의 추악함인지 불합리한 시스템에 순응하는 것이 인도인들의 미덕이라 역설하고 싶은건지 전체적으로 산만하고 많은 감정선들이 겹쳐있지만 잘라내면서 보면 괜찮았던거 같았다. 주변을 보면 조는 사람도 제법 있고. 그 조는 사람때문에 방해받는 사람도 있고
아마도 이 극에서 가장 현자는 프리타일거 같다. 왜 프리타는 교육을 받을수 있었던건지 이해는 안된다. 실파는 일을 시켰는데 둘째인 프리타는 왜 학교를 자유롭게 다니지? 환경이 좋아진것도 전혀 없어 보이는데. 권선징악 뭐 그런 드라마는 없다. 그냥 못 사는 사람은 좌절하고 억울하게 피해보고 돌파구를 찾으려 애쓰지만 이용만 당한다. 마지막에 프리타가 세탁시설을 부순건지 플랜카드 한개 떨궜을뿐인데 정치인이나 라훌, 깡패가 두려워하는데 그 플랜카드 한개 떨구면 모든 사업이 물거품이 되는 골든키였을까? 알수 없지만 아무튼 사업이 물거품이 된거 같다. 프리타의 결단으로..
인도의 천민의 삶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그들을 보며 한국의 현실을 투영하고자 했나. 그러기엔 너무 멀고 다른 세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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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쉴드 라이프? 어떤 의미일까. 보호막이 없는 삶 정도? 여기서 보호막은 기후가 변화되어 사람이 살수 없는 환경이 된 지구의 외적 형태를 뜻할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빈민에 대한 삶을 말하기도 하는거 같다.
지구 기후를 핑계로 밀려난 사람들의 삶을 말하는데 여기서 온난화 이전 세대와 온난화 이후(쉴드가 필요한세대) 태어난 세대가 나온다 한국에서는 기득권층이 세대간 이간질을 지독하게 해놔서 극 중 상황이라면 서로 치고박고 싸우지 않았을까싶지만 그냥 평화롭게 살아간다. 돈독한 가족같지만 그다지 의미 없다. 그런데 조금은 특이한것이 기후로 인해 지구가 망가지기 전 삶을 살았던 노인은 과거를 회상하고 그리워하지만 막상 어떤 도전따위는 하지 않는다. 반면 그때의 그 세상을 알지 못하는 젊은 청년은 빈민인 자신의 삶을 이겨내려고 이상한 재단의 꼬임에 넘어가 세상을 바꿔보려고 떠나는 시도를 한다. 기억속엔 지구의 옛모습이 없지만 지금의 삶이 너무 팍팍하니 이겨내려고 하는데 더 나은 삶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그것을 동경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인간이 지금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지향하고 노력하는것은 수많은 매스컴들이 이러한 허상을 계속 주입시키기때문아닌가. 과거 SF(과학소설)영화를 보더라도 항상 저 위에서는 무엇인가 유토피아같은 세상을 홍보한다. 물론 손에 닫지 않는 먼곳에서 선전을 한다. 그러니 인간들이 저 삶을 동경하도록 만드는데 지금 이 쉴드에서 살고 있는 젊은이는 무엇을 위해서 이러는 것일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극 자체가 그다지 치밀한 구성을 갖고있지 않다.
쉴드를 업그레이드하고 고치는데 드는 비용은 이상한 알바같은것으로 돈을 버는 모양세인데 이 부분도 엉성하기 그지없다. 한국 SF의 특징이나 심각한 문제점은 미래의 어느 세계를 대충 그리면 있지도 않은 세상이니 되겠거니 하는것이다. 치밀하고 세밀하면서 집요해야 하는 연결성이 결부된다. 그래서 한국의 SF는 대부분 똥망한다. 동기가 명확해야 인물들의 행동이 어느정도 납득되고 설득되고 동화되는것 아닌가..
그나마 2050년쯤엔 가능할듯한것정도는 도우미 로봇정도? 지금 기술발전을 보면 25년 후면 충분히 가능할거 같긴 한데 문제는 빈민이 구입할수는 없을것이다. 그정도로 보편화되기엔 멀고 험한 분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허구 세계의 약간은 수용가능할 수 있는정도로 넘길수 있다. 그러기때문에 로봇 배우의 행동은 매우 공감이 된다. 그리고 그다지 갈등요소에 들어오지도 않기때문에 더욱더 신경이 안쓰인다. 만약에 두 배우간의 갈등속에서 로봇이 중재하겠다고 끼어들었다면 아주 짜증이 날뻔했지만 그런 사고는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흐름에서 독특하거나 신선하거나 긴장감 같은 몰입할 수 있는 것들을 찾긴 어려웠다. 처음엔 스릴러인가?싶다가도 갑자기 모 단체가 나왔지만 허무하게도 자신의 잇속만 챙기기 위한 존재정도 (세기말에 나타나는 사이비같은 존재들. 사람들의 돈만을 노리고 영달만을 추구하는 집단들)
어떠한 배경이 되는 무엇인가 필요할듯 한데 쉴드란게 구체적으로 왜 필요한것인지 모르겠고 이산화 탄소가 왜? 지구 온난화와 이상한 복장은 어떤 연관성이 있는거지? 자외선은 밤에 다니면 해결되는건데. 모르는 유독가스가 있나? 아니면 이산화탄소 농도가 사람이 살수 없을정도로 많은가? 이산화탄소가 실내에서 많이 배출된다고 세금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건 무슨 헛소리지? 산소를 중앙에서 재공하는 시스템인가. 쉴드 비용은 개인이 직접 지불하도록 되어 있는데
다들 뛰어난 연기로 눈으로는 거슬리는 것이 없지만 머리속에선 거슬리는게 한두가지가 아닌 엉성한 연극이 아닐 수 없다.
연출가전이니 연출께서 좋은 작품을 선정하면 되는 문제인데 왜 이런 엉성한 작품을 선정한것인지.. 배우들 연기도 훌륭한 일품 연기자들인데 작품이 좀 섭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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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춤이 언제 만들어진거지? 오래된것인지 근래에 만들어진것인지 그리고 어떤 뚜렷한 줄거리가 있는 내용인데 이런건 단순히 춤이라 하면 되는건가 그냥 춤(무용)공연이라 하면 되는건지 그러기엔 너무 두리뭉실한거 같고 범위가 너무 넓은데
단테신곡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죽음에 대한 세계를 묘사한다곤 하지만 이런 글을 보지 않고 보면 '아~ 저승을 그리고 있군'이라고 알 수 있는건가 나는 춤으로 나타내는것중엔 그나마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그리움, 사랑, 환희, 분노.. 뭐 이런 비교적 단순한 표현들정도나 알수 있는정도지 이게 어떤 공간, 배경, 변화.. 등 그들이 말하는 수많은 의미를 구분하진 못한다.
음악도 어떤 감정의 흐름정도나 간접적으로 느낄뿐 영화같은것에서 보면 서로 연주로 대화한다거나 하는 그런 허무맹랑한 경지에 오른적도 없으니 그 깊이가 매우 얕다고 할 수 있다.
이번 공연 환생을 소개한 팜플렛을 보고나서야 그렇구나 할뿐이었다. 그런데 조금전 팜플렛을 보면 무척 놀란것이 있는데 각 무용수들의 배역의 이름들이 있었다는것이다. 사택왕후, 선화공주, 무왕, 지명법사, 수문장 백제때의 이야기인가? 누가 사택왕후고 누가 선화공주지? 전체적인 줄거리가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것일까?
단테의 신곡은 사후의 세계, 속칭 저승에 대해 이야기 하니 이것 역시 그런거 같다. 그런데 옛 이야기의 후속, 그래서 외전이라 붙인것인가? 그 후의 이야기 처럼 그러면 단테의 신곡이 아니라 불교적 사상이 훨씬 깊은거 아닌가? 전체적인 느낌도 윤회에 가깝게 흘러가던데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깔고 가는지 그에 관련한 무엇이 있으면 좋을거 같지만 전혀 부연설명이 없다. 춤이란게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공연예술의 한 장르겠으나 이야기를 붙여놨다면 나같이 이해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개략적이지만 조금은 상세한 줄거리를 알려주는건 어땠을까싶다. (공연중 알려달라는게 아니고 팜플렛 혹은 홈페이지 내에서라도)
막이 끝날때마다 주제를 한줄로 표기하기때문에 일단 상황은 알겠지만 저들은 저 춤을 익히면서 안무가, 감독이 끊임없이 그때의 그 감정을 살리기 위한 배경설명을 많이 했을텐데 정작 이것을 받아드려야 하는 관객은 어떠한 정보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냥 너는 떡이나 먹고 가라. 떡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왜 만들어졌는지, 언제부터 먹기시작했는지 따위는 신경쓰지말고 입에넣고 씹다가 삼키면 되. 라는 것으로밖엔 다가오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해도 소화는 훌륭히 잘 된다. 왜냐하면 전문가들이 맛있고 소화 잘되게 잘 만들어놨으니까. 그래서 감동이 없었다는것은 아니다. 충분히 감동적이고 행위예술에서 받는 감동의 종류는 표현하기 힘들정도로 많기때문에 그중 몇가지에만 걸리면 마음은 동요된다. 저 무용가들의 미친 춤사위는 나를 흥분시키에는 충분한 능력들이나 역시 섭섭함이 남는것은 어쩔수 없다. 나의 문외한을 탓해야겠지만 이건 지극히 전문가들만을 위한 공연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오페라나 발레 기타 음악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공연에서 주된 것들(무용,노래, 음악극 등)에선 음악을 연주는 최대한 멋지게 하지만 정면에 드러나게 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주가 되는 것에 집중하기 힘들기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공연은 연주하는 분들이 무대 윗쪽에 제법 잘보이도록 세팅되고 연주의 현란함 또한 잘 보이도록 임의로 설정한거 같다. 그것때문인지 가끔 무용수들을 봐야 하는데 연주자를 보게 되는 내 모습을 보게 된다. 왜 이렇게 해놓은거지? 춤 스케치라는 슬로건을 내건 공연이면 저 무용수들에게 집중하도록 해줘야 하는거 아닌가?
늘 외지고 어두운 그늘에서 고생하는모습이 안쓰러웠나?
다른 특이한점은 여자 무용수 한명은 척추 전체를 문신을 한 사람이 있었다. 어떤 독립적인 배역이 있는 사람이면 이 사람을 위한 분장이겠거니 넘겼을텐데(남자들도 문신 같은 무늬를 몸에 많이 그려넣어서 주홍글씨 같기도 하고 계급을 뜻하는거 같기도 한 그냥 무늬 그림 문신) 맨몸이 잘 보이는 직업인 무용수가 실제 문신을 한다고? 영화 '존윅'에서 나오는 발레리나들이 문신을 엄청 하고 있긴 하지만 이건 영화에서 어떤 상징을 뜻하기때문인거 같고 몸의 선을 중시하는 무용수가 시선을 빼앗기는 특이한 짓을 한건 이번 처음봐서 좀 뭐랄까? 보는 내내 신경쓰여서 영 별루던데 차라리 남자배역을 맡아서 저들처럼 가짜문신을 했으면 신경쓰이지 않았겠지만 같은 역할들의 다른 무용수들과는 다른 그 튀는 모양은 꽤나 별로였다.(왜 했을까? 척추 수술을 했나?) 분장인데 내가 착각한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무용은 서양고전이나 한국고전과는 제법 다른거 같지만 그렇다고 난해한 현대예술도 아닌거 같고 좀 쉽게 풀어내려는 수많은 무대 장치들과 뛰어나며 직관적인 효과음과 음악들 그리고 무용의 조화로움 내용을 이해못하지만 그 흐름의 완결성이랄까? 표현의 아름다움과 경의로움을 느끼게 했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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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보면 한 인물의 심리변화를 나타내는거 같다. 침묵하다가 어떤 사건으로 의심하고 그러다가 깨달음으로 그런데 오산이다. 제목만으로 추정하는 것은 이제 그만해야 할 시기인거 같다. 제대로 맞추는 경우가 극히 없는데 왜 시놉을 보지 않고 제목만 보고 예매하는건지..
물론 예매한 후에 잊고 살기때문에 예매할때의 추정이 기억나는 경우는 잘 없지만 그래도.
천주교의 신부 3명이 등장한다.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같이 캐릭터가 극명하게 갈리는것은 아니지만 각각 인물마다 개성이 있고 보통 세명의 친구라고 하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구성원이지 않을까싶은 설정이다.
중계하는 한 사람과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 그러나 셋 모두에게 얘기못하는 애환을 가지고 있다. 젊었을 한때의 추억도 일부 공유하고(이러지 않으면 친구라 하기에 좀 그렇지)
기승전결이 명확하다고 할까. 줄거리는 뻔할뻔자지만 보이는 흐름과 구성, 배우들의 일품 연기와 소소한 재미들 소재가 다양하면서 지루하지 않게 잘 꾸며져있다. 다만 내가 이쪽 세계의 용어를 잘 몰라서 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안되는 것들도 좀 있는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그냥 흘려도 되는 그런 시시콜콜한 우리내 삶 같은 이야기들이다.
친한 친구 셋이 모여 술을 마시다가 한 친구가 자신의 현실과 맞지않는 쪽으로 흘러가는것을 나머지 두 친구가 막으려다가 결국 자신들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아 한숨 푹푹 쉬는 그러면서도 은연중 끈끈하게 연대되어 있는 동무들..
예전 TV 드라나 '세친구' 같다고 해야 하나.. 잘난놈, 덜 잘난놈, 노는놈 셋이 친구가 안될거 같지만 동무가 된다는 것은 공통된 관심사와 어느정도 맞는 정서와 표현력 등 많은 것들이 맞아야 동무가 될텐데 연극에서는 그러한 점을 잘 파고든다.
그래서 서로 말싸움을 독하게 하더라도 찐득함이 잘 표현된다. 흐름도 어느정도 예상이 충분히 되는 상황이라서 마음 편히 저들을 받아드렸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한 신부가 신부직을 버렸다면 어땠을까? 연극을 좀더 길게 가고 해피엔딩으로 끝내기엔 어려운 진행이겠지만 이게 더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천주교 신부는 교회 목사가 될순 없는건가? 그리고 신부가 그만둘땐 교황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고 연극에서 나오는데 천주교는 세계의 거대조직이란게 거짓이 아닌거 같다.
지금생각해보면 전체적으로 밝은 늬앙스의 연극이었나? 싶기도 하다. 서로 싸우는 것이 거의 3분의 2는 되는데 중재하는 신부가 있어서 극단적으로 흐르진 않았지만 절반 이상을 주된사건과 시시콜콜한 사건들로 언성이 잦아들때가 없었는데 말끔하게 끝난것도 신기하고 극장을 나올때의 뒷맛도 가볍다. 신파같은거 없고 한국드라마처럼 일순간에 개연성은 개나 줘버리고 끝내버리는것도 없다.
이런 드라마가 갖는 특징이겠지. 뻔하지만 그 뻔함을 뻔하지 않게 잘 꾸며놔서 누가 봐도 삐딱하지 않을 조금 큰 극장에서(달오름이나 정동같은곳) 공연해도 충분히 매력 넘칠 연극으로 예쁜 가을날에 적합한 연극이 아니었나싶다.
그런데 직장인 할인은 뭘까? 백수는 어떻게 하라고? 제발 이런 이상한 할인은 없애주고 만원 낮은 가격을 기본가격으로 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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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녁 7시30분 공연인데 중간 쉬는 시간 포함해서 170분? 가끔은 이렇게 한밤중 공연 한편 기분좋게 보고 집에 오는것도 좋긴 한데 집까지 또 한시간을 가야하니 쉽지 않다. 올해는 앞으로도 적지 않은 편수를 평일공연으로 예매해놨으니 조금은 한숨이 나온다.
흔한 심청을 생각하고 왔다가 큰코다칠수도 있을수 있지만 전체적으론 그렇지 않다. 일단 한 90%는 심청전 줄거리를 거의 그대로 따른다. 1인 판소리 장르를 떼창으로 하니 다들 끝까지 좋은 목 상태를 유지해서 안쓰러움도 없고(한명이 하는 판소리 완창은 언제나 힘들어 보임)
현대적인 의상, 현대적인 배경으로 바껴있다. 현대물로 완전히 바꿔놓은것인가? 고전 '로미오와 줄리엣'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현대 버전같이?
인당수에 빠지는 부분까지만 봤을때는 옷만 현대적이지 그냥 고전물인가 싶었는데 끝은 그것과 거리가 멀어보이고 이해하기도 쉽지는 않았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들이 눈을 뜬다?까지는 내용 흐름상 장르가 판타지니 그러려니 하는데 이번 각색된것은 저 소녀의 정체는 무엇인가? 심봉사는? 환경은 조폭에게 당하는 일가족을 말하는거 같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무엇을 상징하는지 이해안되는 부분이 많다. 파격적이네 뭐네 하긴 하는데 기존 극에서 잔인성을 부각하게되면 웬만해선 파격적이 된다. 이 창극 역시 노랫가락으로 부드럽게 넘기는 부분을 좀더 현실감 있게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져들때 다리를 묶고 무거운 물체에 매달았다거나 하는건 아무리 심청이의 심정이 굳건하더라도 죽음앞에선 쉽지않기때문에 잔인한 현실의 실감나는 설정이다.
전제적으로 다른 공연에서는 접하기 쉽지 않은 기괴하면서 아방가르드(전위적)한 창연극인데 이런류의 특징이 너무 작가주의적이라서 이해해야 하는 관객입장을 잘 고려되지 않는다는것이 심각한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그래서 한국사람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알고 있는 심청전을 보면서 ???????? 라는 물음표가 나오게 하는것이겠지
좀 그렇고 그런 내용을 무대장치와 음악 그리고 창으로 떼우고 있는거 같다.
처음보는 광경으로 카메라맨 한명이 라이브로 계속 무대를 왔다갔다하면서 찍는다 그것을 무대 윗쪽에 실시간으로 적절하게 화면으로 뿌려지는데 개인적으로 저장영상을 무대에 플레이하는걸 싫어하지만 이번은 획기적이라 해야 할지 단순히 막 찍는걸 그냥 보여주는게 아니라 잘 짜여진 동선 그대로 연출이 원하는 그림을 그대로 만들어가는듯, 관객은 영상이나 무대의 배우들이 하나된 공연을 보는듯 거슬림 없는 훌륭한 무대를 만드는걸 보면서 감탄을 안할 수 없었다. 특히 흑백으로 표현되는 영상은 그 특유의 자극적으로 부각되는 표현은 일반 무대의 배우들에게 볼 수 없는 모습으로 인물의 이중적 모습을 실시간으로 감상할할수 있다. 다만 카메라맨이 기계를 주렁주렁 매달고 왔다 갔다 하니 시선을 빼앗기는거 같아서 좀 그렇지만 아무튼 오랜만에 느끼는 신선하고 창의적 연출을 본거 같은 뿌뜻함? 기분좋음? 대충 그런느낌이긴 한데
심청전 배경엔 분명 인신공양이 있었던 무지한 세계였을것이다. 왕과 함께 죽는 순장도 조선이전에 있었을정도였으니 인류 역사 한 1~2백년만 앞서가면 얼마나 미개한 생태계였는지 단번에 알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 인신공양은 대부분 여자아이, 갓난아기등을 했다는 것이다. (여아를 주로 했던것은 아무래도 전쟁으로 남자수가 부족하고 성인여자는 출산과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니 그런것이 아닌가생각됨)
아무리 그렇다고 지금 시대의 여자 아이들이 떼로 웃으면서 나오고(거의 백명은 되보임) 나중에 심청이가 죽고 다시 살아났을때도 떼로 서있는 장면은 뭔가 섬뜩하다. 특히 초입부분에 아이들이 막 웃을땐 공포심마져 들던데 일부 중년 여성들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귀엽다고 좋아하지만 나는 왜 공포심으로 다가왔을까? 인위적 웃음소리를 떼로 들어서 그런것인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웃어서 그런가? 물론 나는 저 웃음을 공감못한다. 심청이의 추정나이는 15세정도로 중학생정도인데 저 아이들은 누가봐도 초등생들이니 심청이 나이 15세면 그 시기 기준으로 결혼할 수 있는 나이로 예전 환경으론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시기라서 아이로 보기엔 무리가 있는데 저 기괴한 아이들의 설정은 무엇일까? 작가가 당시의 나이와 지금의 나이를 착각하는것인가? 꼬맹이 철부지 아이의 심청이를 생각하는것인가?
그리고 현대의상까지는 그러려니 하는데 심청이의 어머니(곽씨)가 돌아가셨을때 마피아, 조폭같은 의상은 뭐지? 심학규가 엄청 잘 사는 조폭인가?싶었다. 그런데 조폭같은 사람들은 심학규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냥 상가집에 온 사람들인데 한국사회에서 상가집에 방문한 사람들의 태도가 저렇다고? 어디서 조폭영화만 잔뜩 보고 온것일까? 이 연극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심청전이 무슨 전쟁, 스릴러, 폭력물인줄 착각하지 않을까?
그리고 심학규가 심청이 젖동냥할때 정말 무서웠다. 검은색 상복을 입은 여자들이 저고리 한쪽을 모두 풀어해치고 무표정하게 서있다. 그것도 수십명이.. 마치 자신은 젖동냥하는 마네킹인냥.. 그래서 더욱더 심봉사가 조폭 두목이고 저 여자들은 어떠한 환경으로 억지 젖동냥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인식했다. 물론 그것과는 관계없는 나만의 오산같다. 이런 전위적이며 추상적인 장르의 특징인 작가가 꼴리는대로 설명하니 좀 거북스럽고 이해가 안되는것은 필수인가. 이런것을 파격이라 하면.. 심청이가 심봉사를 이용해 돈벌고 장기 팔고 흥청망청 사는 내용으로 바꿔놔도 파격이라 포장하겠지.
현대적 해석은 일단 고전의 내용을 충실히 하면서 현대인들의 시각을 가미해서 재해석해야 하는데 이렇게 비꼬아놓고 해석을 달리했다는건 납득하기 쉽지 않다. 이 작가 작품중 '점찌고 옹녀'를 봐도 여성주의적(페미니즘) 시각으로 좀 이상하게 꼬아놔서 비주얼은 좋아도 막상 내용은 별로였는데 이 작가의 특징인지..(작가마다 뷰에 몰빵하고 내용은 겉치레에 불과한 사람도 있고 반대인 사람도 있고)
아무튼 이상한 오해를 받을수 있는 충분함이 있다.
그리고 장승상댁 부인은 무슨 매춘부 알선하는 사람처럼 묘사하는건 왜일까. 조폭 느아르를 만들고 싶었던거인지도 모르겠다. 선인을 악인으로 바꿔놓는것이 현시대의 시선이란소린지 아마도 이부분은 심청이가 막판에 만신창이가 되니 그 일환으로 장승상댁도 그런 주변인물로 바꿔놓은것일수 있긴 하지만 이럴바엔 '심청'이란 제목을 쓰지 말던가. 이게 이렇게 되면 심청전 원전대로 만들어지는 공연을 볼때 색안경이 씌어지지 않겠나. 선악이 갈리는 장르는 아니지만 묘사된 인물의 성품에 색이 있다면 그 성향은 바꿔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전 조폭을 미화하는 영화가 문제 됬던것은 수많은 사람 중 소수가 미화된 혹은 악화된 것을 그대로 받아드려 사회 문제가 될수 있기때문 아니었나)
그리고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보이도록 만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공양미 300석을 시주하면 눈을 뜰수 있다고 얘기했던 화주승을 거의 악의 화신처럼 그려놓고 있다. 공양미 이야기 자체가 가스라이팅해서 자신의 딸을 사창가(장기 매매인가?) 같은곳에 팔라고 강요하는듯한 나쁜놈의 우두머리처럼 그리고 표현한다. 이름이 요나김(김요나라고 한국 이름표기법대로 사용하는것도 아니고 외국 방식대로 했다는것은 자신은 한국인이 아니라는것을 표현한것일텐데 한국사람 껍떼기를 한 외국인인가? 글로벌시대에 이런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국사람인척 하면서 뒷구멍으로 한국 욕하고 자신의 이익추구만을 일삼는 매국노들이 문제지)이던데 종교적 색채가 묻어나오는건 나의 선입견때문일거 같다. (찾아보면 요나는 남자 세레명이라 하던데 이분은 여성 아닌가?)
전체 배경이 조선시대 어떤 효를 강요하듯 꾸며낸듯한 이런 내용이 아닌 거친 배경에서 생존을 위해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세상에 악마화 된 종교인이 없을리는 없겠지만 심청전에서 화주승이 갖는 의미는 종교에 대한 어떤 망상같은 성찰과 거짓 능력 등이 부각되는 주된 장면으로서 서유기에서 멍청해보이는 삼장법사가 지니고 있는 종교적 상징성과 비슷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인물인데 시정잡배, 사기꾼따위로 만들어 놨다는것은 기독교의 에반겔리즘(복음주의)으로 비롯된 배타주의의 파생이 아닐까? '너네가 믿는 저 종교의 뒷모습은 이렇게 추악한 사탄과 같은 존재다~'라는것을 우회하여 비꼬듯
화주승때문에 심청이는 인당수에서 죽게 되는데 문제는 이로인해 다시 살아나고 황후(조선시대에 황후가 있나?)가 된다는 온갖 설화를 막 가져온듯한 이상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전체 뼈대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고? 그것도 사상적 뼈대가 되는 불교와 도교의 자비롭고 신비로웠던 세계를 개깡패같은 놈으로?
작금의 한국은 이상한 미신에 휘둘려 나라가 개판일보직전까지 몰렸다가 한국 민중들께서 합심해서 간신히 위기를 되돌려놓은 상황이니 종교의 폐해를 모르는바 아니지만 그렇다면 고전을 현대물로 재해석하는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신작을 만들어야지 멀쩡히 있는 과거로부터 사랑받아왔던 한국인 정서에 잘 부합하는(아비가 딸을 파는것 말고) 내용을 가지고 와서 썩어버린 사회에서 치유되지 못하게 만들어놓는것은 어떤 저의가 있는지 솔직히 의심스럽다.
이 공연을 본 사람은 앞으로 심청전을 효녀심청이로 볼 수 있을까? 영화 '아마데우스' 때문에 살리에르를 천하에 못된놈으로 바꿔버렸는데(아무리 영화적 허용이라해도 이러면 안되는거 아닌가?)
효자,효녀란게 과거에 허벅지 살을 도려내어 부모님을 공양했다는 것이 지금 통용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판소리 심청가는 전체적으로 보면 좀 해학스럽다. 심청이 어머니는 가부장적인 남편을 극진히 모시고 심청을 낳았지만 딸이라서 좀 서운해 하기도 하고 (심학규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심학규가 봉사기때문에 부귀영화도 힘든 상황)
심청이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대목은 무척 슬프다만 이 후부터는 심학규와 심청이의 부녀지간 사이도 적당한 그냥 형편 어려운 가정이었다. 딸자식을 어떤 꾀임에 빠져 300석에 팔았다손 치더라도 황당한건 생각보다 심학규의 삶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는것 뺑덕어멈과 동거를 할때도 딸 팔아 공양 후 남은 돈으로 적당히 잘 먹고 잘 살다가 돈이 거의 떨어질 무렵에 심청이는 인당수에 빠져 죽다가 살아나 용궁에서 엄마도 보고 착하게 살았다고 황후가 되서 맹인잔치를 열고 각 고을에선 돈을 줘가며 잔치에 보내니 심학규 입장에는 땡큐 아닌가?
제일 특이한건 심학규는 맹인잔치에 가면서 뺑덕어멈을 잃었지만 홀로가면서 여인네들 일좀 도와주며 밥,고기 등 얻어먹고 옷을 홀라당 잃어버렸음에도 기지를 발휘해 옷, 노잣돈, 담배(당시엔 비쌌다고 함)도 얻는등 웃기게도 좀 황당한 호사를 누린다. 게다가 안씨를 만나서 결과적으론 재혼까지 하게 되는데 안씨는 부자기도 하다. 아마도 심청전에서 승자는 심학규가 아닐까싶을정도
심청전의 특징은 웬만해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행복하게 끝난다는 것. 심청가, 춘향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 이런 한국 공연문화를 보면 한놈만 완벽하게 나쁜놈을 만드는 경향을 보긴 쉽지 않다. 그래서 결국 다같이 조화롭게 잘 살아간다는 황당한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특정 종교적 시선이 가미되면 선악이 확실하게 구분되면서 중간에 선을 딱! 그어놓으려 애쓴다. 이번 '심청' 창극을 꼭 그렇게 볼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3시간 남짓되는 동안 해학은 어디에도 없고 우울하고 암울하며 더럽고 추악하다. 영화 '베트맨'의 고담시티나 영화 '씬시티'같이 디스토피아도 아니고 유토피아도 아닌 못된짓을 하면 적당히 밥은 먹고 살거 같은 세상이랄까?
왜곡된 섹스어필, 이런 배경이라면 당연히 필요하겠지. 괴기스러운 여자들, 북에 피는 왜 발라놓은것일까? 이럴때 피는 여자의 그것을 상징하긴 하는데 그것이 맞을까?
오늘 콘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였지만 퇴근 후 3시간동안 졸음따위는 개나 줘버린 몰입력 끝장나는 창극이었으나 무엇인가 가슴한편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남아있다는것은 전위예술의 특징이려나.. 신선함은 최고인데 무엇이 불편하게 만드는걸까.. 재미있는지 없는지 가늠하기엔 어려우니 두어번은 더 봐봐야 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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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난해하다. 재미있다고 하기엔 무엇인가 좀 심각하게 복재된듯한 아류작을 보는 기분이 들고 그렇다고 엉망이라고 하기엔 또 많은 부분에서 멋지다고 할수도 있고
2022년 초연 된 음악극라는데 내용은 식상함 그 자체다. 어느 독재자의 신변보호, 대회활동을 위해 비슷 사람들 내세운다는 설정이다. 네번째 대역 배우란 말은 사람마다 나눠놓은 역할이 있는데 그중 네번째 역할이란 말일뿐 아무런 의미도 없다. 전직 배우였기때문에 그에 알맞는 대역을 맡은것일뿐이라 이런걸 왜 제목에 넣었는지 모르겠다. 불필요하게 길기만 할뿐..(난 쇼맨이 제목이고 네번째 대역배우는 멀티 캐스팅으로 4번째 배우란 소린줄 알았음)
아무튼 쇼하는 사람이다. 어떤 나쁜놈을 대신해서 쇼를 하는것이니 쇼맨만으로 제목으로서 충분한데 다시봐도 꽤나 구차하고 구질구질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제목은 그냥 '쇼맨'일거란 생각이다. 부연설명, 부재 정도를 일부러 붙여놨겠지
아무튼 한때의 쇼맨이 늙어 놀이공원에서 인형탈을 쓰고 있다가 어떤 사진작가를 눈여겨보고 부탁을 한다. 자신의 사진을 찍어달라는.. 나는 이때 영정사진을 찍어달라는줄 알았다.(분장을 안해서 젊은 사람으로 보이는데 말이 늙은 사람 흉내를 내는것을 보고 늙은이 역할이구나 했지만 그러면 노인 탈을 쓰던가 늙은 네불라, 젊은 네불라 두명으로 좀 나눠서 하던가 분장도 제대로 안해서 저 사람이 늙은 이 인지, 젊은 이 인지.. 꽤나 성의 없는 설정이 아닐 수 없다. (하기 싫은 연극을 억지로 하는건가?) 아주 젊어보이는 사람이 말투만 늙은 이 흉내를 내니 얼마나 이상하겠나...
대충 자기최면을 걸면서 보면 적당히 볼만한듯 하지만 나는 이 음악극이 어떻게 대상을 받았는지 솔직히 납득할 수 없다. 어디선가 본듯한 내용의 전개. 어설픈 설정, 음악극이니 음악이 좋았을수 있지만 정동극장에서 음악감독이 누군지 모르겠으나 오늘만큼은 완전 개판이었다.(이건 후술)
도데체 네불라의 무슨 일대기를 어떻게 찍었다는거지? 저 사진작가(가짜라기보단 아마추어?)는 도데체 뭘 찍고 있는거고 네불라가 주저리 주저리 과거를 얘기할때 옆에서 얼굴을 찍으란 소린지 아니면 계속 과거를 이야기해주면서 연기를 하고 있었던건지.. 다시 생각해도 우낀 설정이다. 수아(사진작가)가 차라리 사진이 아닌 글 작가라면 물흐르듯 자연스러웠을테고 한 인물의 전기를 정리한다고 하면 말도안되는 사진작가보단 어울리는 설정 아닌가?
마지막에 무엇인가 잔뜩 찍었다곤 하지만 뭘 찍었다는 건지.. 네불라는 그걸 보며 상념에 잠기는건 또 뭔지 하여튼 무엇인가 우끼다. 관객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만 옹기종기모여 비밀이야기를 하고 있는거 같다.
생뚱맞게 수아의 어린 과거는 또 무엇일까? 도데체 이 사람은 왜 속물이란거지? 동료를 이용해서 진급하려 했다는거? 당장 먹고 살기 어려우면 무엇이든 못할까? 작가가 부유하게 자라왔나? 그래서 이해를 못하는건가?
아무튼 자신이 동생을 제대로 못 돌봐서 동생이 다친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그것도 맞지 않다. 동생이 크게 다친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동생을 구하려다가 자신이 다쳤지만 아빠는 알아봐주지않아 마음의 상처만 깊어질뿐..
뭐 그냥 내용이 이러하다..
네불라의 일대기도 어떤 영화에선가 본듯한 아류작 같고 수아의 과거도 어디선가 본듯한 아유작 같은것들을 섞어놨을뿐 작품에는 어디에도 신선하다거나 창의적이거나 사회문제를 꼬집는다거나 인간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본다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다만 메인 주제일수도 있고 현재 한국사회에서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친일매국노 세력을 옹호하는 일부 종교단체와 그 무리들을 보면 저들의 잘못이 보이지만 자신이 살아온 시간 속에 섞여있기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리속에서 나오지 못하는 현 실태를 보는듯 해서 착잡함이 좀 들긴 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규모나 정도의 차이일뿐 조금씩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연결된 부조리와 모순된 자아를 볼 수 있다. 누구에게나...
그리고 시작하자마자 이러한 흐름이 지속되니 급격히 졸려오는게 무려 한시간이나 지속된다. 왜 였을까? 잠도 충분히 널널하게 자고와서 졸음이 오기엔 어려웠던 상황인데
추측컨데 그 중 한가지는 음향 아~ 정말 다시 생각해도 개그지같은 음향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일단 배우들의 마이크는 왜 그렇게 크게 해놨는지 규모가 대극장만하지 않은 정동극장에서 목소리만 커도 마이크 없이 공연이 가능할정도지만 배우들의 목도 생각해서 마이크 착용하는건 좋은 선택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목소리 밸런스가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었다. 그냥 소리가 크다. 그래서 무대 좌우로 왔다갔다 할때 위치감이 전혀 없다. 대형 극장, 대형 음악극을 볼때 이런 현상이 심해서 좀 거슬려하는편인데 이런 중형 극장에서 이런것을 느낄줄이야.. 배우가 말을 하는데 배우 입이 아닌 스피커에서 다른 사람이 대사하는듯한 느낌마져 드는 개판 설정이다.
그리고 음악 사운드는 또 왜 그렇게 볼륨을 처올려놨는지 내가 거의 뒷쪽에 앉았음에도 귀가 아플지경이다. 나이를 먹고 있어서 점점 난청이 올법한 시기임에도 소음으로 다가올정도면 도데체 젊은 이들은 어떻게 받아드렸을까? 음향감독은 싸이의 훔뻑쇼가 부러웠던것이냐? 아니면 귀머거리더냐.. 음향 밸런스는 또 얼마나 개판인지 명색이 음악극(뮤지컬)인데 음악 가사가 거의 안들릴정도로 음향설정이 억망이다. (음향지식이 좀 부족하면 서울국립극장 음향팀에게 지원요청을 좀 해라.. 그곳만큼 좋은곳도 드믈더라)
이러니 절반 이상을 하품만 하지.. 배우들은 목 터져라 노래부르지만 관객 그누구도 노래가 끝났다고 박수치는 사람 하나 없다. 감동을 받을수 없게 만들어놨으니 박수를 칠수가 있나..
오늘은 무척 특이한 경험도 한거 같다. 배우들 여럿이 군복같은것을 입고 뭐라 뭐라 노래부르며 스팟 조명을 받는데 스팟이 배우들 뒷쪽에서 쏘는 통에 배우들은 후광을 받은 효과를 볼 수 있지만 관객석까지 각도가 잡혀있어서 좀 앞쪽에 앉아있는 관객들은 갑자기 눈뽕에 당황스러워한다. 이들에겐 환불해줘야 하지않나? 최소한 가장 값 싼 요금을 적용하고 나머지는 돌려줘야 하는거 아닌가?
내가 수많은 연극을 봐왔지만 관객에게 직접 스팟을 그것도 머리 위에서 아래로가 아닌 정면(역광?)에서 쏘는건 처음 봤다. 이러면 가뜩이나 전체적으로 어두운 공간에서 관객들은 순간 홍체가 확장하며 눈 통증이 발생할 수 있다. 제법 위험할수도 있는것인데 조명감독은 장님인가? 또라인가? 사이코패스인가? 정동극장 생김세때문이고? 내가 이곳을 적지않게 왔음에도 이런적은 없었다.
그리고 막판 네불라의 성찰같은 장면에 뒷쪽에서 노을같은것을 연출하고 싶었나본데 누런 텅스텐 조명을 관객석에 직선으로 쏴댄다. 도데체 화이트 아웃이 몇번째냐..
사진작가 컨셉은 그러려니 하지만 왜 실제 크세논관 플래시를 터트리냐.. 미친거냐? 플래시를 터뜨릴려면 관객석과 정반대 방향으로 터뜨리던가. 아~~ 한숨이 나온다.
이렇게 개판이라도 관객이 만석이라 신경안쓰는것인가? 이딴게 만석이라니.. 이딴 음악극에 기립박수를 친다고? 노래가 끝나도 박수 한번 안치던 사람들이? 미리 짠것인지 앞자리 한 무더기 사람들이 우루루 일어나더니 다른 사람들도 슬금슬금 일어난다.
조명을 관객석에 쏘질 않나 소리는 너무 커서 뒷좌석에도 소음으로 들리질 않나 내용은 어디서 본듯하고
신기하다. 자기들이 홍보한다고 SNS에 사진을 잔뜩 올려놓고 관객들보곤 커튼콜때도 사진 찍지 말란다. 뭘까? 무엇이 찔리는걸까? 컨튼콜 사진을 못찍게 하는것은 웬만하면 보지않는게 좋다. 그림전시회도 사진못찍게 하는것일수록 가짜그림이 대다수에 그마져도 볼게 없는 전시회들이다. 남들과 다른 정책을 내세운것들은 무엇인가 켕기는게 있다는것이니 내용도 별로일경우가 많다.
최소한 음향이라도 개선되면 그때 보시길 권함.. 지금은 관객들 난청올수 있음 특히 나이가 적을수록 귀 건강에 안좋고 앞자리는 가급적 앉지 마시길.. 조명을 그지같이 설정해서 눈건강에 치명적일수 있음 웬만하면 카메라 플래시는 좀 쓰지말거나 무대쪽을 향하자. 관객들 눈 아프다.
이제 마이크도 좋고 음향시스템이 미치게 좋은 세상인데 벨칸토는 좀 버리면 안되나? 음악극 창법으로 쓰기엔 지금 시대와 안맞는걸 못 느끼나? 옛날작품도 아니고 명색이 21세기 최신작인데 아직도 이런 곰팡내나는 삼백년전 창법으로 작사작곡을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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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동국은 무죽페스티벌도 좋고 지금 하고 있는 연출가전도 좋은거 같다. 이곳은 관객석 의자가 좀 후져서(앞뒤 좁고 자세가 조금 불편해서 다리 아픔) 그렇지 전반적으로 공연하는 연극들의 품질은 고민안하고 선택해도 될정도로 엄선된 것들만 올리는거 같다.
오늘 연극은 3명의 출연자들이 각기 다른 현재의 자신이 되도록 한 과거들의 사건들을 소개하고 그것을 이겨내고 있다는 일종의 3편의 옴니버스형식의 성장드라마 구조같이 진행된다.
셋은 서로 동무(친구보다 동무가 친근해보이고 국민학교시절만 해도 책에 동무라고 나옴)같은데 영화? 연극? 어떤 형식의 모임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서로 동무관계는 확실한거 같다.
모두 실명으로 나오는데 내용은 각각의 실제 과거 이야기인지 창작물인지 모르겠다만 흔하면서도 특이한 그런 과거를 지닌다.
우리 인간이 어느정도 성숙되었을때의 사고형태가 생각보단 모두 다르듯 이것은 자라온 환경에 따른 후천적 영향이 대단히 중요하기때문이다. 물론 선천적 성향도 있지만 그것들을 거부하게 만드는것이 현실의 왜곡된 시선들이 아니었을까..
기억의 장속에 넣어두는 세월의 흔적들, 특히 몸에 걸치는 의상류들이 주된 소재이나 엄밀히 따지만 이 소재들은 거의 의미 없어보인다. 그리고 잘 맞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특히 고현우의 아기때 입은 배냇저고리는 너무 오버 아닌가? 그 시절이 기억나는것도 아닌데 사랑에 목매면서 배냇저고리 냄새를 맡다니.. 이정도면 변태적 성향으로 변질될 우려가 커보인다. 잘못 생각하면 소아성애자 취급을 받을수도 있는 조금은 너무 간듯한 전개이다. 다만 이것은 줄거리를 이어가기 위한 소품정도에 불과하니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김주은의 하얀색 드레스도 그런데 하얀색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이것이 깨끗해서가 아니라 자칫 잘못된 색을 입히면 돌이킬 수 없기때문이다. 그래서 조심히 가장 어울리는 색을 입히기 위해 신중 또 신중히 고려한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 혹은 타인의 방해로 원하지 않는 색이 입혀지면 평생을 이색때문에 시달린다. 여기서 말하는 잘못 된 색은 바로 주변의 잘못된 인식과 주입 그런것때문에 때묻지 않은 아이가 고통이란것을 알게 되고 괴로워 하며 그것을 이겨내고자 수많은 노력들을 하지만 모두 그것을 이겨내는것은 결코 아니다. 연극에서는 자신을 괴롭히던 과거를 회피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으로 마무리 되지만 이것 역시 쉽지 않다. 사람들 대부분, 어쩌면 모두 아이일때의 상처로 인해 평생동안 행동의 제약(강박) 한두개쯤은 가지고 있을것이다. 깊게 새겨진 이 죄의식을 흰색으로 깨끗히 되돌린 사람이 있을까? 기껏해야 외면하는것정도로 마무리 될뿐이다.
고현우와 장채원은 뭔가 조금은 과장된? 혹은 좀 쌔고 소설속에나 있을법한 내용들을 다룬다. 장채원은 가정폭력. 그래서 어머니, 딸(장채원), 오빠가 함께 가출을 했는데 어머니와 오빠의 잦은 싸움으로 어머니와 오빠가 집을 떠난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장채원 아이일때 아버지의 폭력으로 오빠와 딸의 사이가 유독 돈독했었는데 장채원만 혼자 남겨놓고 떠난다? 그것도 엄마와 오빠 둘 모두가? 이게 사실이라면 너무 슬픈 과거겠지만 발생하기 어려운일같이 보인다. (부모의 폭행으로 가출까지는 어느정도 가능한데 이후 아무런 기약도 없이 모두 흩어진다? 이 설정이 좀)
그리고 고현우는 비만에 대한 것인데 소아비만은 세포수가 많아진 비만이라 살을 빼는게 대단히 어렵다고한다. 대부분 성인이 된 후에 비만이 되면 세포자체가 커지는 것이라 식이요법으로 빼면 효과가 좋은데 세포수 자체가 많은 소아비만은 애초에 이 수를 줄이지 않으면 좀처럼 다이어트 효과가 덜하다고 한다. 이 사람은 소아비만에 해당되지만 일단 한국은 온갖 전쟁이 빈번했던 1800~1900년대는 빈곤함은 기본으로 달고 살았기때문에 아기들이 통통을 넘어 퉁퉁한것이 복인냥 서로들 칭찬하기 일색이다. 나 또한 아기일때 몸이 컸는데 동내 사람들이 엄청 좋아했다고 한다. 고현우도 아이일때 이러한 칭찬을 늘 받고 자랐기때문에 자신의 몸이 커지는것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없다가 몸이 커져서 불편해질 무렵부턴 무엇인가 잘못된것을 느낀다. 여기까지는 그럴수 있다손 치더라도 아버지가 목욕탕을 같이 가는게 챵피하다고 했다니.. 이부분에서 솔직히 기분이 완전히 망쳤다고 할까? 사람의 자존감을 가장 많이 뭉게는 사람이 부모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남들 앞에 보이기 챵피하다고 부모가 자식에게 말한다고? 자식이 부모를 챵피해 하는 경우는 있어도 반대의 경우는 결코 없다는게 부모자식의 운명같은 관계인데.. 물론 나의 부모를 생각하면 완전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닌거 같지만 그럼에도 자식에게 그런말을 할수가 있을까?
김주은과 고현우는 사회의 잘못된 시선, 장채원은 가정폭력 이 모든 과거를 씻으려고 이들은 노력한다. 뭐 그런 성장드라마다. 내용이 좀 와닿지 않고(모두 사실이라도 내용을 순화하거나 관객이 받아드릴수 있는 정도의 각색은 좀) 75분 연극임에도 리듬이 툭!툭! 끊기는 흐름은 왜 그런지.. 배우들의 서로 연계는 좋던데 전체 스토리 전개에서 설정 변경시에 리듬과 호흡이 모두 끊겨서 재미 있으면서도 답답하고 지루함이 있다. 한사람당 25분정도로 짧게 자신의 스토리를 이야기하니 웬만하면 넘어갈텐데 이 짧은 단락에도 리듬이 끊기고 호흡이 정지되니 75분도 기~일~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곳이 가끔식 생기니 프로젝터 영상이나 텍스트는 좀 줄이고 적어도 텍스트는 배우들이 각각 상황에 맞게 읊으며 넘어가도 되는것을 왜 정지시키는 건지.. 여운의 시간이 너무 길면 감동은 사라지고 하품이 찾아오는 전형을 보여주는거 같다.
각 배우들의 과거 디테일을 좀더 살리면 2시간도 지루할 틈이 없을 좋은 작품인데 설정이 좀 아쉽고 극장 관객석이 후진것에 다시한번 아쉬웠다.
그렇다고 관객이 열명도 안될만큼 이상한 연극은 아니었는데.. 이정도면 이정도 규모의 소극장엔 거의 만석에 가깝게 관객이 있어도 될 연극인데 날이 너무 더워서였는지 적은 관객수는 좀 안타까움이 드는 연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