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버스안에선 밖이 보여도 밖을 알 수 없으나 길에서 10분을 넘기기 어려운 한파
수요일보단 낫긴 하지만 이번 추위는 제법 오래 가는거 같다.
이 작가는 왜 '아버지'라는 제목을 붙인걸까?
스웨덴에서 '아버지'라고 제목을 붙였을때 그 작품엔 어떤 선입견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스트린드베리만의 여성관에서 한국정서의 아버지 라는것과는 너무 다른 과정을 보여준다.
선입견때문에 이 연극을 봐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한국에서 문학적 아버지는 망상, 환상, 남성우월주의..등 온갖것들로 현실의 남성 목을 조인다)
보고 나온 지금은 좋은 기분이지만 한편으론 남여의 오랜 분쟁을 극화 한듯하여
고민하지 않아도 될 고민거리를 안고 나온 기분이 든다.
남 여 그리고 자식
이 삼각 구조는 한 집단을 구성하는 구성원으로 지탱하는 다리 역활을 하기때문에
무엇 하나가 빠져도 중심을 잃어 쓰러지거나 나머지 구성원들이 힘들게 버텨야 한다.
그래서 이 구성원을 유지하기 위한 수많은 수단중 한가지가 유전자 보존이라는 이상한 본능
(엄밀히 따져서 이 구성의 근본은 유전자 보존이란 목적이며 나머지 모두는 수단에 불과할수 있다)
지독한 본능을 실현하기 위해 여자라는 동물은 미숙아를 출산하게 되었고
집안 식구들을 이용해 아버지의 유전자를 품고 있다는것을 자식의 아버지에게 세뇌 시킨다.
(여성측에서 아이와 남편간의 유전적 공통점-닮았다고들-을 끊임없이 말하는것은
이 구성원이 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며 오래된 역사임)
스트린드베리가 살았던 시대(1800년대 후반)엔 유전자 검사란게 있을리 없다
심지어 혈액형이란것 자체도 이무렵에 나온 학설이기때문에 검사할 수 있지도 않으니
더욱더 수많은 말들에 현혹될수밖에 없던 시절
이 시대에 유전적(일명 혈육) 부모자식간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었을까?
이것은 다르게 표현해서 여성을 불결하다고 누명을 씌우려 하면 벗어나기 어려운 시기라는것이고
인류역사상 혈족을 객관적으로 확인 할 수 있는 방법은 최근에야 나온 것이며 이 또한 100%의 확률도 아니다.
남여간 갈들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기때문에 어느정도 법같은것으로 방어해줬겠지만
아무튼 객관적 진실을 알아낼 방법은 마땅하지 않았던 시기다.
이런 무지에서 나오는 인간의 갈등을 다룬다.
(지능만 높은 멍청이들의 싸움?)
이 아이가 네 자식이 아닐수도 있다. 진실을 알려고 하지 마라.
저 아이가 내 자식이 아닌거 같다. 내 자식인것을 증명해라..
생각해보면 지금도 관련분야에 종사하지 않는이상 그것을 증명할 길은 없다.
이런 불안전한 시대에서 이런 위험한 불신을 여자가 남자에게 심는다?
(이것은 자신의 몸에 스스로 불을 지르는 행위로 당시 여성 혐오의 정도가 보이는듯하다)
그 불신에 남자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결국 파멸한다.
이시기에 작가의 부부 사이가 힘들어서 여성혐오가 심해졌다곤 하지만
이 연극을 보고 있자면 치밀하게 남성을 파괴하는 인물로 묘사하므로 여성혐오의 정점을 찍는거 같다.
심지어 부인이 남편을 파멸시키는 행동의 근원을 제대로 생각하지도 않거나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듯한
여자의 잔인한 본능이라는 늬앙스 마져 풍긴다.
(면밀히 듣고 있자면 근원은 양자간에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여성의 잔인성을 표출시키는거 같다)
오랜 세월 여성의 지휘를 낮추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 해왔고 대부분 먹혀들었다.
(출산이란게 없었다면 이 전쟁에서 누가 이겼을지)
언제나 약자, 혐오, 증오, 파멸의 대상이 되어왔지만 유독 어머니는 그 대상에서 빠진다.
(이 극에서도 유모에 대한 상호 신뢰는 여느 모자지간 못지 않다.)
작가의 당시 부부관계가 얼마나 난국이었을지,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대부분 연인들간의 관계가 안좋아지면 다 이런 상태가 되기는 하겠지만
직업이 작가니 그 심정이 작품으로 표출된것이고 그 심정을 간접적으로 엿본게 되었고
관객들은 이 연극을 통해 다시 한번 끊어지지 않는 기나긴 싸움을 생각하게 된다.
7명이 나오는 연극이지만 그리 혼란스럽진 않으나
여성배우들은 분장에서 배역에 맞는 특색이 좀 없는거 같고
(자식이나 부모나 유모 얼굴에 주름 몇개 차이 외엔 그다지. 다들 젊은 분들이라 그런가?)
대사량이 대단히 많은 연극이지만 다들 훌륭하게 연기를 한 덕분에
두시간 가량을 몰입해서 볼 수 있었지만
디테일한 표현은 전달이 다소 안되지 않나?싶다.
(심리묘사는 살살 부는 바람같을수도 있어서 미묘한 표현이라도 관객에게 전달되야 의도를 파악하기 좋음)
약간 흘리며 들어도 전체 흐름을 이해하는것에는 지장이 없지만
이 연극을 보고 있자면 그 세밀한 디테일 하나 하나 건들고 흔드는 맛이 있는거 같은데
때때로 넘겨버리게 되니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격양된 장면들이 중후반부부터 많아지니 억양이나 호흡이 흐트러질수 있지만
물리적 파멸이 아닌 심리적 붕괴를 나타내는 연극이니 이런 부분을 좀더 신경써주는것이 좋지 않나싶다.
수많은 관객들이 지인들인지 모르겠으나 인사들 하고 그러던데
생각해보자면 지인이 연극을 해서 그것을 관람하러 왔다면 더욱더 관람예의를 갖추지 않나?
연극도중 휴대폰 불이 켜지는 사람도 있고, 진동음이 울리는 사람
어디서는 과자를 까는 사람(부스럭 거리더니 과자 특유의 향이 풍겨서 추측하게 됨)등 다양하던데
연기하던 말던 신경 안쓴다는 것인가?
훌륭한 연극을 사소한 부주의로 가치를 잃는다면 본인들 손해일텐데
(약간은 산만한 관객들의 분주함 덕분에 0.1%정도는 잃은거 같음)
3주동안 가볍고 즐거운 연극만 보다가
간만에 눈알에 핏대서는 연극을 봤더니 묘한 감동이 생기는 괜찮은 주말이었다.
아~ 내장탕에 밥 두공기 먹고 들어와서
찜빵 5개 먹고 한시간 자고 일어났는데
왜 이렇게 배가 고프지.. 흑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