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공연2023. 4. 30.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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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국악 정보를 접할수 있는 방법은 길을 걷다가 우연히 보게 되는 포스터
또는 몇몇의 공공기관이 운영 문화 사이트에서 오는 메일
그리고 페북같은 SNS에서 친구로 맽어놓은 국악인들이 올리는 정보에서 공연정보를 얻는데
이번과 같이 평일에 공연하게 되면 회사원인 입장에서 관람하기 쉽지 않지만
잠시 백수가 되어 좋은 기회다 싶어 국립국악원에서 연주회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공연이 있어서
바로 예매했지만 평일 오후 7시30분에 관람한다는건 집에 오면 9시가 넘기때문에 아무리 백수라도 부담이 된다.

부담 되더라도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올해는 연주회를 좀 다니고자 하는 생각이
봄 언제쯤인가 문득 생각이 들어서였다.

단독 콘서트는 아니고 두명이 나와서 한시간동안 연주하는것이라 국악을 잘 모르는 나라도 크게 걱정이 되진 않았다.

예술의 전당 미술관은 적지않게 다녔지만 바로옆에 붙어있는 국립국악원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리고 독특하게도 신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풍류사랑방.. 크~~
옛 선비들이 모여 명인의 연주회를 들으며 풍류를 즐기던 그런 모양은 아니지만 ^_^
조금 상상은 할수 있다. 어떤곳인가 인터넷을 찾아보면 다기와 차도 주던데 이번은 그런게 없었다.
그리고 양반다리를 할수도 있지만 좌석 거리가 좀 좁아서 양반다리하는게 조금 불편했지만 가능 하다는게 기분좋다.
첫날은 비가 와서 바닥을 온돌처럼 따뜻하게 해놨던데 공연장에서 엉덩이가 따뜻해본적 있던가
(오늘은 덜 춥다고 히터를 끈거 같음 ^_^;;)

폭신한 좌식의자 하지만 좌석간 거리가 좁아서 좌식으론 못 앉는 이상한 배치(널널하면 그만큼 관람인원이 줄어드니 이해함)

첫날도 긴장되고 둘째날인 오늘도 긴장된다. 왜냐면 음악의 선율을 이해하기 어렵기때문이다.
국악 음반이 좀 있는데 주로 판소리, 민요같은것이고 연주는 가야금, 대금 산조들이 나머지지만 듣다보면 솔직히 무엇을 표현하는지 모르겠다.
무엇이 연상되거나 어떤 느낌이 난다거나 해야 할거 같은데 한국것임에도 모르겠다.
내게 와닿는 느낌은 약간의 변조가 버무려진 도돌이표같다고 해야 할지, 비발디 4계도 이보단 덜 반복적일듯 싶다.

아무튼 시작되는 첫무대는 피리
얘는 목관악기겠지만 흔히 서양악기의 목관악기 음색을 생각하면 제법 난감하다.

그냥 풀피리 같기도 한 대나무에 구멍 뚤어놓은듯한 나무 막대기
'서'라고 하는 리드와 나무 한개가 끝인데 소리도 맑고 청량하고 투명하다거나 부드럽다와는 좀 거리가 있다.
말 그대로 투박한 소리가 나온다. 고급진 소리보단 군살 잔뜩 붙어있는 농부의 손같이 거칠거칠하다.

끊임없이 무엇인가 반복되는 멜로디가 있는데 이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모르겠다.
기승전결이 있는 것인지도 솔직히 잘은 모르겠다.
다만 저 투박해 보이는 악기위의 손가락의 움직과 그에 맞춰 퍼지는 선은 때론 곱고 때론 강렬하고 이상하다.

아기처럼 섬세하기도 하고 쟁기질을 하듯 거칠다.
그렇지만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판소리는 문자화된 구체적인 서사가 있기때문에 읽을 줄 알고 뜻만 알면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사양 고전음악류들 역시 기승전결이나 주제가 있기때문에 감정이 선율의 고조에 맞춰 긴장이완을 충분히 할수 있어서
시간의 아름다움을 만끽할수 있지만 한국의 피리연주는 모르겠다
왜 이렇게 반복이 많은걸까. 이것이 주제는 아닐건데, 이것이 주제라면 그것은 또 무엇인가.

국악의 특징인지 모르겠지만 연주자의 무표정 또한 한몫 크게 한다.
한국 사계를 말하는걸까, 선비의 올곧음일까, 연인의 사랑일까
아무튼 무엇인지 모르지만 길지 않은 시간이라 짧게 즐겨봤지만
피리 연주로 한시간정도 했다면 나는 틀림없이 졸았을 것이다. 대금산조는 음이 표현하는 것들이 많아서
좋던데 피리는 그렇게까진 만들기 어려운지 솔로 연주에 특화된 악기가 아닌것인지 아무튼 미묘한 변화 말곤
전체적으론 단조로운 반복의 연속이었다.

두번째는 내가 좋아하고 배우고 싶어하는 거문고연주다.
거문고를 좋아하는 것은 지독히 간결하고 절제된 선율때문인데 이번 연주자(박영승)의 연주는 내가 생각했던
그런 연주는 아니었다. 생각한 거문고 연주보단 훨씬 경쾌하다고하면 맞는 표현인지
그리고 서양 악기 연주자 처럼 온몸으로 운율을 타는 모습이 사뭇 신기하기도 하고 멋지기도 했다.

악기 연주자니 손의 움직임을 아무래도 보게 되는데 흐름이 끊김없이 물 흐르듯 유연하며 강렬하다.
글로 표현하긴 아직 어렵지만 거문고 특유의 독특한 여운은 비록 좀 빠른 연주라 덜하더라도
사이 사이 사그러드는 물결은 순간의 고요함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나의 국악 연주회 첫경험을 모르쇠로 일관하며 끝나버렸다 ^_^;;;;

둘째날인 오늘 세번째는 다시 피리
피리는 참 어렵다. 아니 단조롭다.
미세한 변화를 알아야내야 하는건지 미세한 음 컨트롤에 환호해야 하는건지
이 음악은 누구에게 무엇을 보이기 위해 작곡된것인지 두번째 들어선 도무지 모르겠다.
연주자(박치완)께는 미안하지만 두번째 경험따위로는 아직 안되나보다.

연주시간이 짧아서 지루하진 않으나 두번째 경험도 이렇게 지나쳐버리니 아쉽다.
관객입장에서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걸까.
우리 음악을 듣는데 공부를 해야 할정도면 초중등교육이 심각하게 왜곡되어졌다는 의미일수도 있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야금이다.
가야금은 기본적으로 너무 익숙하고 민요, 창등 병창에도 많이 나와서 어색함이 전혀 없다.
음 표현의 다채로움으로 귀가 무척 즐겁지만 국악기중엔 너무 핑크핑크한 느낌이라 배워보고 싶진 않았던 악기다.

처음은 가야금 산조인데 여느 가야금 산조와 크게 다름은 없어보인다.
다만 이렇게 가야금 산조를 눈앞에서 본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인데,
짧막하겐 보적 있고 각종 영상 매체에서도 많이 봤는데 느낌이 너무 다르다.

서로 각기 다른 놀림의 왼손과 오른손,  그 것들을 묵묵히 지켜보는 지긋이 바라보는 두 눈과 근엄한 몸짓

분명히 한사람의 연주를 보고 있는데 소편성 교향곡을 눈으로 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물론 눈만 그러하다.
소리는 잘 녹음된 수많은 연주보단 훨씬 음장이 좋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차이가 나는것은 아니다.
그래서 가야금 연주가 비주얼적으로 이렇게 강렬한지 오늘 처음 알았다.

연주중에도 틈틈히 얼굴에 뭐가 묻었는지 닦아내는데 결코 급하게 닦지 않는다.
매우 리드미컬하다고 해야 할지 그러면서 끊김없는 손동작으로 얼굴을 닦아내고 다시 현으로 손을 올려놓는다.
(국악기 연주자들은 이런 손동작도 따로 교육을 받는건가? 의문이 들정도로 부드러운 선을 유지한다.)

역시 종특이라 해야 할지 단아함 그 자체의 표정으로 변화없는 매력을 뿜어낸다.

양손은 저리도 바삐 움직이는데 저런 고운 자태를 만들수 있는것은 저 사람의 수많은 피땀의 결과겠지만

가야금연주를 배워보고 싶게 하는 짧은 시간의 황홀함이었다.

한국악기중 가야금, 거문고는 한사람의 각 기관이 서로 침범하지 않으면서 조화로움을 만들어내는것부터 시작일까

미치도록 절제된 움직임속의 실내악.

마지막으로 피리와 가야금이 함께 연주하는데 특별한 고저가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미묘한 변화를 지속한다.
차한잔 마시며 친구와 도란도란 담소나누기 좋은, 절의 풍경소리 같은 연주다.
가야금은 각 음절의 시작과 끝을 담당하고 피리는 살을 붙이는 식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것을 무엇이라 하는지 모르겠지만 시조의 운율 같아보이기도 하다.
무엇이 되었던 이들을 떼어놓으면 한쪽이 너무 외로울거 같은 조합으로 끈끈히 이어가다가 조용히 막을 내린다.
연인의 삶일까, 벗의 관계일까, 외로운 군자의 삶은 아닌거 같다.

어쩜 이리도 근사할까..

그러나 아직도 잘 모르겠다. 좀더 많이 봐봐야 할거 같은데 백수생활도 끝나가고
평일에 어떻게 봐야 할지도 걱정이다.
올해는 되도록 연주를 많이 보고 싶은데

출연 : 거문고 박영승, 피리 박치완, 가야금 김윤희, 피리 고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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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세상
연극.공연2023. 4. 23.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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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몸무게가 줄지 않는다.
그다지 많이 먹는것도 아니고 군것질은 아예 하지도 않는데 왜 이럴까..
늙어서는 에너지를 저장해야만 젊은이들과 비슷하게 살아갈수 있다는 조물주의 배려인가

어느순간부터 가스라이팅이란 단어가 많이 들려서 정신의학쪽에서 정의된 전문용어를
어떤 비판가가 써서 유행된건가?했다. 갑자기 너무 유행이 되기도 했고 수많은 곳에서 공공연하게 사용하니
정식 용어겠거니 했었는데 이 어원이 되는 연극을 오늘 보게 된것이다.

그리고 이 희곡이 나온지가 80년이나 된 1938년이라는 것과 가스라이팅이란 말은 죽은 말이 되었다가
도널드트럼프 대선시절 비판하기 위해 다시 사용되면서 유행되었다고 위키에 나온는데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기득권층이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수많은 매체를 이용하는 오래된 방법이다.
각종 매체를 단속하고 모두 형사처벌해야하지만 단속해야 할 주체가 그 일부이니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현실이다.
(각종 젠더갈등, 세대별 갈등, 지역갈등, 상호 불신등, 심지어 노조까지도 갈라치기한다. 이것도 세금받아쳐먹는놈들이)

이 단어의 어원이 이 연극인줄은 몰랐고 누군가 가스라이팅 당하는 현실 비판적 연극인줄 알고 예매하게 되었는데
현상이 비슷하기때문에 단어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면 다르게 생각할것은 없다.
시대와 배경이 좀 어색하지만 그것역시 문제 될만한것도 아니다.

이런류를 보면 항상 느끼게 되는것이 있는데, 사기를 치려면 남을 현혹시키는 능력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하며 무엇에 약한지 어떻게 구술려야 하는지 등 모든 정보가 있어도 표현을 알맞게 하지 못하면 안되기때문이다.
거짓말 잘하는 아이들이 지능이 높다고 했던가? 다르게 생각하면 사람을 현혹시키는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최고 지능을 지닌 사람들로 생각될때가 많다.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기때문에 주의해야겠지만 부러운 능력이다.

전체 흐름은 단어가 깔고 있는 의미를 알고 있기때문에 스릴러같은 전개와는 다르게 전혀 그렇지 와닿지는 않는다는 것과
가끔 너무 큰 액션들때문에 놀라게 되는데 좁은 공간에서 미친듯한 큰 괴성으로 대사를 해야 하는것인지

시작부터 고저가 너무 극단적이라 보는동안 놀랄지 않으려고 긴장을 놓을수가 없어서
2시간의 공연이 지루하지 않지만 극장을 나올땐 제법 힘이 빠진 느낌이 드는데
극은 해피엔딩처럼 보이나 관객인 나는 결코 해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착잡하다고 해야 맞는거 같다.

배우들간의 호흡이나 연기는 너무 좋은데(무죽페스티벌의 특징이랄지.. 연극 품질이 너무 좋음)
템포가 어느부분은 너무 느리고 또 어느부분은 너무 함축적으로 지나가버린다.
첫장이라 해야할지 1막이라 해야 할지, 그 부분이 거의 연극의 절반을 먹는데 은근히 지루하다.
템포도 엄청 느리고 상황설명도 무언가 빠진듯 공허하다.

중후반에 나오는 수사관때문에 공백을 채워주긴 하는데 마지못해 채워넣는듯한 느낌으로 자연스럽질 않다.
내용 전개상 대충 그러할것이라는 예상은 하게되나 윗층에서 남편이 보석을 뒤질때 발소리는 들리는데
아랫층에서 수사관과 부인이 소리지르며 대화하는건 윗층에서는 안들리는것일까
그리고 무슨 집이 윗층 아랫층 사이가 수십분의 시간이나 필요한것인지..
(윗층에서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린다면 한참 떨어진 곳도 아닌데)

전체적으로 배경에 대한 상황설명이 미흡해서 구성의 견고함이 깨져버린다.
원작이 그런것인지 유튜브에 1940년에 나온 영화를 볼수 있던데 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고민될정도로
내용자체가 편하지 않고 소재자체도 흥미롭지 않아서일텐데
인물들의 심리묘사에 초점을 두고 대사전달에 모든 역량을 투입했으면 어땠을까싶다.

그리고 극장이 워낙 좁으니 왠만하면 환경에 맞춰서 소리지르는건 가급적 다른 표현방법을 찾아서
각 인물들에게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으면 좋겠다.

출연 : 박상협, 전세기, 김달님, 변나라, 조은진, 류승주

Posted by 시세상
연극.공연2023. 4. 17.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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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청쪽 극장인 정동세실극장을 가는데 서울시립미술관이나 국립현대미술관을
가지 않는것도 참 오랜만이다. 오래도록 매주 구입했던 복권도 까먹어 구입못한걸 봐서는
요 며칠간은 정신줄을 놓고 있는거 같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해야겠지만 한편으론 찝찝

창극? 음악극(뮤지컬, 오페라류같이 벨칸토 창법으로 하는 류)들중 판소리로 하는것이라서
한국사람들의 접근성 만큼은 좋겠다란 막연한 생각을 했지만 이건 나중에 말해보도록 하고
일단 흥보가는 몰라도 흥보이야기를 모르는 한국사람은 극히 드믈기때문에 내용측면에서도 그렇고
현대에 맞게 살을 붙여서 이해하기 쉽고 편하게 관람이 가능하다는 큰 잇점이 있다.

전통이란게 문헌으로만 넘어오는게 아니라 생활 곳곳에 섞여 자신도 모르게 습득 되는 수많은 것들이니
제비다리 고쳐서 박씨 물고와 은혜를 갚고 대충 형동생 사이좋게 지냈다는 해피엔딩의 이야기쯤은
아이때부터 봐왔던 것들로 사회문화 전반적으로 깊숙히 자리잡고 있으니 어떻게 각색을 해도 문제되지 않지만
너무 흔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놓냐에 따라서 익숙함에서 오는 지독한 지루함이 올 수도 있다.

이 연극은 이것을 적당히 풀어내는거 같긴 하다.
다른 판소리의 대목을 따와 알맞게 각색도하고..(십장가 대목은 춘향가의 슬픈 상황이 떠올라서 더 슬프다.)
제비 노정기도 멋지게 잘 표현한다. 하지만 무슨 소린지는 그들과 전공자들만 알겠지..

그런데 흥보 마누라의 이름이 '강옥진'이라고 나온다!? 이게 무슨 말이지
물론 흥보는 이름인데 마누라는 이름이 없이 등장한다. 놀부 역시 놀부 마누라라고 나올뿐이다.
흥보가에서 흥보마누라의 비중이 크지 않고 주된 내용은 형제간의 문제라서 자식들도 이름없이 나온다.
놀부 마누라 역시 주걱으로 뺨을 때리는 충격적인 역할이 있지만 역시 이름이 없다.

엄밀히 따져서 흥보가 전체에서 놀부와 흥보 말고는 이름이 없다. 누구 씨 또는 직책 정도일뿐

그런데 이 극에서는 마누라의 비중이 대단히 높기때문인지 이름을 공개하고 만다. 이때부터 무엇인가 트러지는데
후반부 모든 판결이 된 이후 약간의 시간동안 이름도 없이 살아온 서러움을 표출하며 이름을 계속 말하지만
이전까지의 모든 감동이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모든것이 퇴색되버려 잊혀지는 느낌이다.

요즘 한창 말 많은 '흑인 인어공주' 같이 불필요한것을 우겨넣은 느낌으로 모든 흥을 깨버린다.
차라리 이러한 서러움을 넣고 싶었다면 처음 재판장에게 '나의 이름은 흥보 마누라가 아니라 강옥진이니 강옥진으로 불러달라'라고
선포하고 그로인한 모든 부당한 대우를 현대적 시각으로 녹여내어 흥보를 압박하던가..
모든 판결과 결말이 다 끝나고 숨을 고르려는 찰라에 갑자기 "나의 이름은 강옥진~~~!"이러면 응??????

여건 신장운동 연극을 보러온건 아닌데

이걸로 10분정도를 지리하게 이어간다. 이전까지 강옥진(흥보 마누라)씨가 주장한 것들은 어느정도 수용가능하고
자식이 수십명이라거나 외도해서 낳은 자식이라거나 제비는 강옥진씨의 은혜를 갚기위함이었다거나 등의 것들은
연극에서 허용되는 왜곡 또는 각색 정도로 감안하고 충분히 수용하며 즐길수 있지만
모든 흥보가의 내용을 버리고 여권운동만을 남겨두면 연극 제목 자체가 '흥보 마누라 이혼소송 사건'이라고 붙이면 안되고
'강옥진의 여권 신장 운동' 이라 해야 된다.
이건 본질 자체가 뒤집어지는 것으로 애초에 흥보가에 붙여서는 안되는 내용으로 사회 풍자, 저항, 항의, 투쟁을 하고자 하면
독립된 내용으로 흥보가는 일부분만 차(인)용하는 수준으로 전개되어야 하지만 소설인 흥보가를 붙여봐야 아무런 설득력을 지니지
못할테니 이마져도 쉽사리 붙이기 어려워 진다. 그런데 이 연극은 모든 흐름을 무시하고 이 대목을 과감하게 붙여버렸다.

여성의 이름대신 성만 말한다거나 모아무개의 마누라 라는 표현을 거의 쓰지 않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도 맞지 않는 이런 황당한
상황을 붙인것은 흥보가 등 모든 판소리의 등장인물에 이름을 붙이겠다는 의지일까

너무 어이없는 끝부분때문에 멍해진 지저분한 느낌은 지금까지도 지워지질 않는다.

그리고 모든 배우들이 젊은 분들이라 발음이 확실히 좋지만 사용하는 문장들, 특히 창의 문장들은
현대어가 아닌것들도 있기때문에 알아듣기 어렵지만 역시나 자막이 없다.
고증한다고 뒤쪽 벽에 대사를 표기해주며 그것을 창으로 선보이니
가사를 모두 보고 들을수 있어서 한결 좋지만 그 외 것들은 전혀 자막이 없다.

판소리 처럼 소리꾼이 임의로 붙이고 빼는것도 아닌데 자막좀 넣어주면 안되는 것일까
기왕이면 외국사람들을 위해서 외국어도 좀 넣어주면 더 좋겠지만 이러한 배려는 없다.

그리고 옆에서 악기로 극에 필요한 음악을 실제로 연주하기때문에 극과 음악의 합이 좋긴 한데
음악소리가 너무 커서 배우들의 대사 전달에 상당히 방해가 된다.
연극을 보러 왔는데 음악소리때문에 대사가 잘 안들리면 문제가 아니겠나.
(모든 내용을 다 외우고 있는 사람들이 모니터링 하면 이런 밸런스 문제가 발생함)

작자 미상인 흥보가에서 마누라 이름이 없어서 마누라가 서럽다고는 할 수 있는데
강옥진이란 이름은 실제 근거가 있는 이름인지, 도데체 어디서 나온 이름인지..
대충 지어낸 이름이면 오히려 전통문화를 죽이는 개짓일텐데(찾아봐도 마땅히 나오는 곳도 없고)
아무튼 이부분은 내용 전체에 녹여내는 것으로 재조정되기를 기대하며 다시 볼수 있길 바라본다.

이런 극은 혼자보는것보단 여럿이 모여 보면 좋을텐데
다음에 또 하면 식구들이나 친구들을 좀 모아볼까 ^_^

출연 : 김율희, 한진수, 전태원, 이재현, 김보람

Posted by 시세상
연극.공연2023. 4. 12.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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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똔체홉 작품은 이 극장에서 저렴하고 안락하게 항상 관람할 수 있다.
이렇게 한 작자의 이름을 걸고 그 사람의 희곡을 주로 공연한다는건 관객입장에선
한 작가의 작품을 계속 보고 싶을때 큰 위력을 발휘한다.
물론 이 극장에서 한 사람의 작품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전에도 그런거 같기도 하고 아닌거 같기도 하고 관객석 앞 무대가 하얀막으로 닫혀있다.
협소한 무대를 보여주기 창피했던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앉아있으면 답답한 기분이 들어
눈을 감고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내 다리가 짧아진걸까 의자가 무척 높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크고 쿠션좋은 의자지만 자세가 무척 불편했다. 전에는 안그랬던거 같은데 뭐가 바뀐걸까
여전이 안깨끗해보이는 폭신한 의자 

영화 '시라노 연예 조작단'인가?가 떠오른다. 그 영화도 제목은 이 작품에서 따왔다고 하고
대충 일부분 비슷한 내용 스럽기도 하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런 내용의 연극 영화는 널려있다. 고백할 수 없어서 죽쒀서 남주는 그런 내용

그런데 17세기 여자들의 위상은 형편없었을텐데.. 백작(드기슈)이 그렇게 예의바를수 있을까?
(과거 서양의 여자 위상은 대부분이 일종의 소유물로 취급받았었기때문에 20세기초 서양에서 여권신장운동이 퍼진건데)

힘과 돈이 있는 백작이라면 강제라도 취하려 했을텐데..

아무튼 시라노는 자신의 외모에 대한 심각한 열등감이 있다고 나오지만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코 얘기를 한다고 칼부터 꺼내는건 시정잡배 아닌가? 흐름은 그러하지만 원작을 읽어보진 않아서
시라노의 내면을 깊게 볼수는 없다. 유쾌하게 표현하지만 조금 깊게 생각하면 정신병적 증상들이 많이 보인다.

17세기 프랑스는 그래도 됬던것인지
작가 에드몽의 강한 열등감이 작품으로 표출된거겠지만 이러한 전개는 수많은 영화에서도 봤기때문에
식상한다. 1897년에 나온 희곡이니 식상하지 않은게 이상한거지만 아무튼 신선하거나 세련됨이 보이진 않는다.

연극 전체의 분위기는 영화 아마데우스와 무척 비슷하다. (뮤지컬 아마데우스를 본적은 없음)
발성이나 표현등 많은 것들이 이 영화와 매우 흡사하고 아마데우스라는 뮤지컬도 이 극장에서 같이 공연하며
배우들이 일부 겹치기도 했기때문에 비슷하게 맞춰진건지 모르지만 아무튼 영화가 겹친다는건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다.

영화가 워낙 뛰어나게 사기 치기도 했고, 너무 재미있다보니 다른 것에서 이렇게 잘 만들어진 것의 냄새가 풍긴다는건
아류작같은 기분이 나기때문인데 영화 시라노도 시대별로 찾아놨으니 봐보면 어느것이 원조인지 알수 있을거다.
영화 아마데우스는 1984년작이고 내가 찾은 시라노는 1950년작, 1990년작, 2021년작이니..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로 협소한 극장을 커버하더라도
너무 작은 무대는 분주하게 움직일수록 소극장의 답답함이 보이는건 어쩔수 없으니
좀더 큰 무대에서(너무 크면 배우들이 잘 안보이니 대학로에 있는 것들중 좀 큰 곳)
무대장치도 좀 더 잘 만들어진곳에서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전체적으로 밝고 이상하고 납득안되고(시대적 배경같은?) 특이하지만
무척 재미있고 신나고 슬픈 2시간30분(쉬는시간포함)이 짧게 느껴지지 않는 훌륭한 연극이었다.

출연 : 조환, 염인섭, 조경미, 조희제, 신우혁, 김미리내, 최성우, 박준홍, 최장천 외 많음

Posted by 시세상
연극.공연2023. 4. 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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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청에서 혜화동까지 왕복은 무리일까
편도만 걸어도 고관절이 아파온다. 오래 걷지 못한다는건 차를 살때가 되었다는건지

지난해 1월1일에 보고 다시 보고자 했던 연극
원래는 같은 해에 다시 한다고 하길래 그때 봐야지 싶었는데 이제서야 다시 보게되었다.

바로 얼마전에 영화 안나카레리나(소피마르소, 1997년)를 봤는데
연극 속 대사를 이해하기 위해 책을 보려했지만 시간이 마땅치 않아서 영화를 본건데 적당한 시기에 봐서
내용도 머리속에 잘 들어와 연극에서 안나를 좀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작년과 무대구조나 전체 흐름의 구성은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다만 첼리스트가 작년에도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없었던거 같은데 아닌가

그리고 톨스토이와 브론스키를 완전히 분리하여 정동환 배우가 톨스토이를 전담하게 되어
예전보다 좀더 다양하게 표현되지만 좀더 복잡해져서 간결하며 절도있는 구성은 사라졌다.
한 인물을 둘로 나눠서 대화하듯 얘기하는건 때론 다중인격자 같아서 어색하기도 하고
하나의 자아로서 동화되기에도 인식의 흐름과 약간의 차이가 발생해서 불편함도 발생한다.

안나와 안나의 생각은 어느정도 보완적이지만 톨스토이는 서로 대립되다보니 더욱더 자아를 묶어내기 쉽지 않다.

그리고 정동영배우의 톤은 자꾸만 드라마 '호텔 델루나'가 떠올라서 머리속에서 드라마를 지우고 싶은 충동이 생기던데
이 드라마를 좋아하기도 하고 여러번 보기도 해서 그 이미지가 자꾸 겹쳐버려
톨스토이의 내면으로 빠져들기가 전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이분의 발성이 한결같아서 그런거 같긴 한데 배우들의 숙명이자 카르마일지도 모르겠다.

125분 연극으로 제법 길 수 있는데 그 시간이 결코 지루할 틈이 없다.
중간 인터미션을 기점으로 해서 최고조로 급격히 변화되는데 이때문에 숨고르기차원에서
쉬는 시간이 주어진거 같지만 그냥 이어졌으면 어땠을까란 생각이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그 전과의 표현양식도 제법 바뀐다. 극단적인 단조로 바뀐다고 해야 할지.
매우 거칠어지는 흐름때문에 심리적으로 무척 조심스럽고 예민해진다. 섣부르게 다가갔다간
안나의 절규에 나같은 범민은 쉽사리 갈기갈기 찢어질것이다.

전체적으로 소피마르소의 안나카레리나와 비슷한 느낌을 풍긴다. 약간은 도도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때론 오만하다. 막상 영화 안나카레리나는 2012년 작품이 더 잘 만들어졌다곤 하지만 영화속 소피의 느낌과
묘하게 겹치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연출이 영화를 많이 참조한건지 정수영 배우가 이 영화를 참고했는지 모르겠음)

톨스토이의 참회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허울을 쫓았던것이 부질없는 허상같다고 할까..
톨스토이의 참회록은 아직 보질 못했는데 대사를 곱씹어보면 공산주의 표상인 낫과 망치가 떠오른다.
종교와 노동으로부터 오는 기쁨, 순수한과 순결함, 인간사회의 평등성
안나카레리나가 50세에 나온 작품이니 인생의 회한을 느낄 시기였을까
이 연극에서는 톨스토이의 고뇌를 표현하지만 매우 표면적인 손 쉬운것들만 가볍게 다룬다.
왜 이 사람은 모든 편의를 포기하고 농부의 삶을 살려고 했던것일까란 결정적 사유가 보여지 않는다.
그래서 이 연극은 톨스토이의 참회록이라 말하면서 안나의 일대기만이 각인된다.

톨스토이가 모든것을 포기하게 된 그 무엇을 찾기 위해 기차역에서 막차를 기다렸던거 같은데 안나를 이용해서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안나는 사랑을 위해 모든것을 던져버리고 마지막 기차를 종착역으로 맞이하였는데..

연극 전체가 고풍스러우면서 기품있는 고급스러움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안나의 죽음은 좀 더 연극적이면서 절망과 희망이 양립하도록 구성되었으면 좋겠는데 두번째 봐도 어색하다.
그리고 톨스토이의 사유가 보고 싶다. 내년에 또 볼수 있으려나.

올해는 작년과 조금 다르던데 내년엔 올해보다 조금 더 달라지길 기대해본다.

출연 : 정동환, 정수정, 주영호, 박채희, 강정민, 안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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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세상
연극.공연2023. 4. 1.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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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백수때는 토,일 연속으로 연극을 봐주는 맛이 좋다.
어제는 따뜻했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바람이 부는지, 얇게 입고나왔다가 추위로 떨게 될줄은 상상도 못했다.

걷고 싶은 햇살이었는데 바람에 떨고 어제 좀 걸었다고 고관절은 또 왜 이리 통증이 있는지
걷지못하고 집에 돌아온것은 아직까지도 아쉽다.

정동세실극장은 이번에 3번째인데 갈적마다 마음에 드는 극장으로
약간은 낡은듯 하지만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차분하고 평온하다.
객석도 괜찮고 무대도 넓다.
어제와 다르게 무대장치도 괜찮은 편이긴 한데, 좌우로 길게 설정된 무대로
끝에서 연기를 하면 좀 멀게 느껴질때가 약간은 아쉽다.
(노안때문에 시력도 이상해졌는데 오페라 망원경이라도 가지고 다녀야 하나..)

한국에서는 무슬림(이슬람교도?)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많을까
당연히 나는 모른다. 쿠란이란건 무엇일까

이 연극의 난해한점은 바로 이 대부분이다. 한국에서 무슬림에 대해, 선지자(무함마드)에 대해
무엇하나도 한국사회에 녹아있는것이 없다. 그러니 저들이 말하는 의미를 알듯 하면서도
깊이있게 접근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이 연극이 훌륭하다고 느껴지는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더라도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고
그로인한 사회 반작용이 무엇인지, 무엇때문에 대다수는 그러지 못하는지 직감적으로 와닿게 표현한다는 것이다.

다만 계속 한대목 물음표가 있는 부분이 있는데 자리나는 왜 아버지인 아프잘에게 자신(자리나)을 지운적이 있다고 했을까
이 부분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전에 만났던 애인때문에 둘간의 관계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건지
어머니가 돌아가실때 문제가 있었던지.. 아무튼 자리나의 가슴한편에 깊은 상처가 있어보이지만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것때문에 더욱더 선지자에 대한 말들이 낯설게 느껴졌던걸까..

역사가 오래된 종교들의 성서들은 대부분 벽에다 대고 말하듯 너무 먼 세상의 언어로 포괄적이며 뜬구름 잡는 말들을 한다.
이것을 접하는 신도들이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할테니. 마치 점쟁이가 듣고자 하는 말들로 현혹하듯
생각을 현혹하는 말들로 가득하다. 이것들을 한발짝 떨어져서 보면 벽창호도 이런 벽창호가 없지만
그 시대엔 그게 먹혔고 현 시대엔 중간자(목사,신부,중 등) 역활을 하는 사람들이 알맞고 듣고 싶도록 해석해주는거겠지만
자리나는 이러한 것들에 신물이 난것인가?

요즘 사이비교단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그 중 JMS(정명석)관련하여 나오는데 어떤 인터뷰에서 아무리 성경을 봐도 모르겠는데 JMS는 이것을 쉽고 명쾌하게 해석해줘서
따르게 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성경을 천번 읽으면 가능하려나 이 사람은 천번 읽었다던데)
이 인터뷰를 보면 사기꾼이던 그렇지 않던 인도자(중간자)는 반드시 듣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메세지를 전달할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된다고 본다.
그러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교리로 방황하게 된다.

자리나는 이렇게 방황하던 사람으로 보인다. 그 시발점은 애인과의 이별때문일테고 아버지의 반대도 큰 이유를 차지하겠지만
좀더 객관적으로 종교를 다가서게되어 좀더 인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이상한 존재가 아닌
인간과 함께 했던 인간적인 존재로서의 선지자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또 하나의 도전이며 반항일수 있고 이단처럼 느껴질수도 있다.
그렇기때문에 자리나의 소설과 식구들에게 사람들이 대항한다. 때론 폭력적 방법까지 동원하며
물론 연극에서 이런 장면이 나오진 않는다. 단지 부녀의 대화속에서만 지나가듯 나올뿐인데
그 상황은 한국사회에서도 충분히 그려지는 현상이다.

이러한 공통점들 때문에 내가 무슬림에 대해 전혀 모르면서도 연극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인간의 배타적 성향과 연인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 각족간의 사랑이 포괄적으로 넓게 표현되는 연극이다.

부모자식의 사랑은 지독한 면이 있어서 이해되지만 솔직히 자리나 부부의 대화는 좀 이상향에 가까운데
논리적이며 따뜻하면서 막힘이 없다. 짜여진 느낌이 너무 강하게 든다는게 좀 아쉽다면 아쉽다.

평범한 가족들의 일상이고 특별함도 없고 자잘한 사건 사고도 거의 없이 단조로운 대화가 초중반까지 이어지다보니
중반까지는 지루함과 졸음이 생기지만 자리나의 소설로 고조되기 시작할때부터 끝까지는 숨쉴틈 없이 진행된다.
후반부부턴 너무 강하게 지속되는 면도 있고 대사량도 많기때문에 머리속이 복잡해지지만
내용 자체가 어렵지 않아서 큰 무리는 없다.

그런데 어제도, 오늘도 극장을 나올때의 뿌듯함? 홀가분함? 벅참? 뭐 그런것이 없다.
한국은 아직 큰 똥덩어리를 처리하지 못해서 그런것일까.. 그래서 뭘 해도 먹먹한것일까..

출연 : 조은원, 정연종, 이승민, 박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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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