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공연

연극 -순우삼촌-

시세상 2025. 11. 22. 21:42

언제적부터인지 이 극장에선 안똔체홉작품을 봐야 할듯하게 길들여진거 같다.
이번 연극 제목이 '순우 삼촌'이지만 변화되는 시대가 불편한 바냐 삼촌의 한국판이랄까

롯데월드 뒤쪽 석촌호수쪽 냇가가 한강 본류였다는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 역시도 알게 된지 얼마 안되었는데
그 이유는 지금있는 한강이 너무 거대하니 주변 지류들은 그냥 냇가정도로만 생각하게 된다.
실제 강이 이렇게 넓은것도 토목공사로 인한것일뿐 한국의 대부분 강을 보면 서울 한강처럼 넓은곳은 없다.

당시(1970년대) 잠실 일대에 개발이 들어가면서 일부는 매몰하고 일부는 한강을 더 넓게하는 등 이것저것 한 후
엄청난 아파트를 지어댄것이 지금의 대단지 아파트들일텐데 바로 직전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런데 당시에 잠실(섬)은 홍수가 엄청 자주 났다고 한다. 그럼에도 수백가구가 살곤 있었다지만
매년 장마가 있는 한국 기후에서 어떻게 살아갔을지.. 또 어떤 계층이 살았을지는 뻔한거 같다.

이곳에서 용이 나왔는데 바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강원 그리고 이 사람을 뒷바라지 한 조환
이강원이 갑자기 온것은 땅을 팔기 위함?(중간쯤 교수자리때문같음) 하지만 이 땅에서 먹고 살았던 조환은 반발한다.
우끼게도 스스로 자살을 시도하다가 이상하게도 순순히 모든 땅을 넘긴다. 왜 저항을 안한 것일까.
안똔체홉 작품도 그렇고 이 각색한 작품도 그렇고 (안똔체홈 바냐삼촌은 엄밀히 말해서 총으로 쏘기도 해서 팔지 않았는데)

좀 특이하다. 요즘 톨스토이 단편집을 좀 보고 있는데 생각보다 신을 빙자해서 자신의 처지에 저항하지 않는다.
왜 그러지? 왜 고통받고 탄압받는데 이것을 이겨내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라 하며 인내하라고 하는거지?

결국 조환은 이강원의 딸마져 책임지며 남았는데 앞으로 땅도 없는데 어떻게 먹고살지도 좀 납득 안되는 상황이다.
바냐삼촌과는 좀 다르게 한국에서 개발이 들어가면 모두 다 갈아버리니 집한채 고작 있어봐야
그것으로는 어떠한 생계도 해결되지 않는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해 보이는 이 집에서 엄마라는 사람은 배다른 자식인 이강원은 남인데도 불구하고
이강원에 대한 엄청난 팬심을 보이는데 왜 이럴까. 바냐삼촌을 봤을때도 좀 이해는 안됬다.
하지만 그 작품과 이 작품의 배경이 좀 다른거 아닌가?
바냐삼촌은 적당히 먹고 살 정도의 토지가 있었지만 순우삼촌은 매년 홍수로 싹 슬려가는 잠실섬에서 농사로 먹고 사는 형편이다.
땅이 있어봐야 가치가 얼마나 된다고..
차라리 배경이 양재, 신사, 삼성 이런곳이라면 논밭이 있던 곳이니 납득될수도 있겠지만 하중도로 여의도, 밤섬, 섬유도같은 잠실섬이었는데
개천에서 용이 날순 있었지만(미국에서 공부하는 뒷바라지가 가능하긴 한 시절인가? 일단 대학교까지는 한국에서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데)
그리고 연극 전반적으로 배경 해설이 좀 미흡해서
생뚱맞은 저 박사와 젊은 애인, 딸, 배다른 동생과 엄마 등 인물들에 대한 배경설명이 거의 없다.
바냐삼촌에서는 교수이자 매형을 지원하는 것이고 그쪽 세계를 동경하하니 그럴수 있는 심정적인 납득도 충분히 된다.
또한 전체적인 인물 배경도 별로 이상하지 않으며 충분히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물론 여기서도 어머니는 바냐편보단 교수편을 드는 신기한 현상이 있지만..

그러다보니 바냐삼촌의 답답하면서 암울한 격변하는 근현대서의 이면을 보는 느낌이 있었던 반면
어떻게? 왜? 저들은 뭐지? 저 사람은 왜? 라는 의문 투성이인 이상한 한국판 바냐삼촌 아류작을 본 느낌이다.

내용 흐름에도 어떤 기대를 할만하지 않고 새련되었거나 신선함은 없지만 고전은 그 나름대로 독특한 맛이 있는데
이건 웬지 이도 저도 아닌 그냥 한국의 바냐를 만들고 싶었던 욕심에서 나온 특이한 작품이 아닌가 싶었다.
한국은 너무 심한 격동기들이 있어서(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두번의 구테타 군부정권)
차라리 고려에서 조선으로 변화될때가 더 잘 어울릴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출연 : 전순우, 전건우, 민다정, 전지숙, 강석준, 정문자, 정수자, 김철구

-추신-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공립 극단 공연의 티켓가격은 최저임금 두배를 넘지 말자